123. 디위나 할멈의 예언

by 화진


슬슬 흩어지던 사람들이 조용히 다시 모여들었다. 그들 중 대부분의 이목이 라무스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느슨해졌던 공기가 다시 탱탱해졌다.


조심스러워진 숨결들에서 긴장의 냄새가 났다. 그러나 이번의 긴장은 조금 전 결투를 구경할 때와 달랐다. 흥분 대신 공포가 흥미 대신 동정이 서린 눈빛이 대부분이었다. 저 낯선 사내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돌아서서 가 버리면 가련한 저 시녀는 꼼짝없이…….


라무스는 자조했다. 몬스의 수하들이 끌어내려고 할 때 달아났어야 했다. 그랬으면 꼴은 좀 우스워졌어도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에 휘말리지는 않았을 텐데. 이러나저러나 이미 페르비아 라크리모의 비겁한 거미줄에 걸려 버렸으니 벌어진 상황에 대한 최선을 도모하는 수밖에.


“잘 알아들었으니 그 서툴고 귀하신 손 그만 내리시죠.”


고향으로 돌아오자마자 자신 때문에 누군가가 희생되는 광경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시데레온의 라무스는 녹스 용병단의 라무스가 아니었다. 만약 그가 녹스의 임무 때문에 이 자리에 있었다면 페르비아가 자기 시녀를 죽이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자리를 떴을 터였다. 그러나 고향을 찾아온 라무스 유바론은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도 안 되고.


페르비아의 손은 단검을 효율적으로 다루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는 단검으로 사람을 해쳐 본 적이 없으니까. 그녀에게 잘 벼린 단검은 언제나 위협이나 협박의 도구였다. 그녀가 진짜로 사람을 죽일 때 쓰는 건 손이 아니라 혀였다. 단 한 마디로 충분했다. ‘죽여.’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난 다 알고 있었어. 와고르 네가 멍청이나 냉혈한이 아니라는 걸.”


이리 오라는 뜻으로 라무스에게 손가락을 까닥이고 나서 페르비아는 시녀의 목에 겨눴던 단검을 내렸다. 시녀의 목에 난 생채기에 핏방울이 맺혔다.


“이런, 푸실라. 피가 나는구나. 그렇게 겁먹은 얼굴 하지 마. 조금 긁힌 것뿐이잖아? 별것 아니야. 그것으로 닦으렴.”


아까 던져 버렸던, 시녀가 주워 들고 있던 제 손수건을 턱짓으로 가리키는 페르비아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푸실라는 쭈뼛쭈뼛 손수건을 목으로 가져갔다. 너무 놀라고 무서워서 날붙이 끝이 목을 찌르는 줄도 몰랐었는데 손수건에 묻은 피를 보자 이제야 목이 따갑고 쓰라렸다.


“이만 돌아가자. 따라 와, 와고르.”


외출의 목적을 만족스럽게 달성한 페르비아가 동작도 가볍게 자신의 말에 올라탔다.


“소인은 여기 산양뿔 주점에 머물지요. 필요하실 때 찾으십시오.”


라무스는 주점 안으로 향했다.


“아니. 넌 나와 같이 간다. 내가 장점이 하나 있는데, 그게 바로 나 자신 이외에는 아무도 믿지 않는다는 거거든.”


페르비아가 눈썹을 찌긋해 보였다.


라무스는 그건 장점이 아니라 단점이지, 하고 속으로 대꾸했다. 믿음을 주지 않는 자는 믿음을 돌려받을 수도 없으니까. 당장은 권력으로 그 결락을 덮을 수 있겠지만, 사람이란 언제든 한 번은 자신의 본성에서 비롯한 처절한 현실과 뼈아프게 대면하게 되는 법이니까.


“난 그래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에는 아주 철두철미하지. 아, 아까 그 협박도 아직 유효해. 유효한 정도가 아니라 이자도 붙었지. 성에 돌아가면 난 푸실라의 남동생인 도키에게 네 시중 겸 감시를 맡길 거야. 이제 네 등에는 두 개의 목숨이 얹혔지. 참고로 도키는 열두 살밖에 안 됐고, 아주 착하고 귀여운 아이지.”


페르비아의 말을 요약하면 ‘네가 도망치면 푸실라와 도키를 죽일 거야.’였다. 라무스는 질렸다는 듯 두 손을 들어 보였다. 그녀의 한 가지 재주는 그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엿같은 소리를 능란하게 돌려 말함으로써 듣는 사람을 더 열 받게 하는 재주였다.


“그럼, 마구간에서 말을 데려오죠.”


몸을 돌리는 라무스의 눈에 아주 잠깐이지만 냉랭한 살기가 비치고 지나갔다. 나는 내가 진짜로 떠날 마음이 생기면 떠난다. 단 그런 일이 생긴다면 페르비아 널 죽이고 가야겠지. 푸실라와 도키의 두 목숨이 내 눈에는 네 목숨보다 가치 있어 보이니 말이야.


“네 말은 몬스가 잘 맡아줄 거야. 넌 내 말 옆에서 걸어. 난 자격 없는 사내와 나란히 말을 달리지 않아.”


“예, 예. 어련하시려고요.”


라무스가 지체 없이 페르비아의 말에게로 걸어갔다. 어차피 갈 데까지 가 보자고 마음먹었으니 와고르라는 떠돌이 기사의 역할에 충실해 보기로 했다.


유바론 가의 성 폴루스 니두스로 올라가는 경사진 숲길의 풍경은 거의 예전 그대로였다.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다면 길 양 옆의 나무들을 솎듯이 베어 놓았다는 것이었다. 베지 않은 나무 사이사이로 무릎 위 높이로 날카롭게 벤 나무그루들이 섞여 있었다.


숲에서 길을 습격하기에 불리하도록 조성해 놓은 것임을 라무스는 단번에 알아차렸다. 삼촌이 저랬을 리는 없으니 가투스 라크리모가 지시한 일일 것이다.


라무스는 집에 돌아오는 꿈을 많이 꿨지만 이 길을 지나는 장면이 어땠는지는 매번 기억나지 않았다. 기억나지 않지만 알 수 있었다. 지금 가고 있는 이런 식은 아니었다는 걸.


“아마 그 자도 결투에 대리인을 내보낼 거야. 검술도 외모만큼이나 형편없는 인간이라고 하니까 말이야.”


페르비아가 말을 시켰다. 침엽수림 특유의 상쾌한 냄새와 석양이 걷혀 가는 숲에 음악처럼 울려 퍼지는 새 소리가 주는 회포에 젖어 있던 라무스는 퍼뜩 추억에서 빠져나왔다.


“그 자가 누구입니까? 결투는 또 무엇을 위한 거고요?”


“웃기는 일이지. 그 따위로 생겨먹은 주제에 감히 나와 결혼하려 들다니. 물론 카푸에 계신 내 큰아버지의 뜻이긴 하지만 말이야. 그 불쌍하고 어리석은 자의 이름은 이리투스 글라키에사. 디위나 할멈이 그랬거든. 내가 산양뿔 주점에서 나를 구해줄 기사를 만날 거라고. 할멈의 예언은 잘 맞으니까 너도 결투에 대해 걱정할 건 없어. 틀림없이 네가 이겨.”


“포르미두사의 이리투스였군요.”


포르미두사라니. 라무스는 헛웃음을 흘렸다. 포르미두사는 시스가 자란 곳이었다. 그녀와 이리투스는 친척인 것이다. 비록 피는 섞이지 않았다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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