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아. 내 큰아버지이신 아바루스 전하께선 이리투스가 포르미두사를 이어받을 거라고 거의 확신하고 계시지. 쿠라토 공작은 후계를 두지 못했으니까. 아들은 적자든 서자든 태어나지 않았고 딸들도 전부 태어나고 아홉 해를 넘기지 못했어. 그래서 현재 쿠라토 공의 죽은 사촌의 아들인 이리투스가 그와 가장 가깝고 정당한 글라키에사 혈통이거든.”
잠자코 들으면서 라무스는 머릿속으로 포르미두사를 둘러싼 정세와 아바루스의 야망을 분석했다.
쿠라토의 불운은 아바루스에게는 기회였다. 더 강력한 권력을 원하는 아바루스는 페르비아와 이리투스를 결혼시킴으로써 포르미두사를 확실히 손아귀에 틀어쥘 작정인 것이다.
라무스는 아바루스가 포르미두사의 공국 지위를 격하하고 페르베아투 왕국의 직할령으로 삼을 가능성도 있다고 내다보았다. 포르미두사는 기후가 온화하고 들이 기름진 곳이었다. 이 가능성이 실현된다면 페르베아투의 재정에 적잖은 보탬이 될 터였다.
“쿠라토 공의 불행에 대해서는 제법 재미있는 풍문이 따라다니는데. 혹시 여기저기 떠돌다가 주워들은 적이 있으려나, 와고르?”
말 위의 페르비아가 골똘한 표정으로 걸어가던 라무스의 팔을 발로 툭 쳤다.
“아, 아뇨.”
“하긴. 주로 귀족 레이디들 사이에서 떠도는 풍문이니까 와고르 같은 사내의 귀에까지 들어가기는 쉽지 않지. 그게 말이야. 쿠라토 공에게 후계가 생기지 않는 게 쫓겨난 공녀의 저주 때문이라고 하더라고.”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을 텐데도 페르비아가 소리를 낮춘 것은 그만큼 은밀한 소문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인 듯했다.
“쫓겨난 공녀라고요? 저주라고요?”
그럴 리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하며 라무스가 되물었다.
쫓겨난 공녀라면 시스일 텐데 그녀가 저주를? 그야말로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소리였다. 포르미두사를 떠날 때 시스는 아홉 살 가량, 어리고 순수한 소녀였을 것이다. 그리고 라무스가 아는 한 시스는 저주나 흑주술을 구사하는 마가가 아니었다.
“그래, 오티움에 보낸다는 구실로 포르미두사에서 쫓아낸 나이아시스 글라키에사 말이야. 고 어리고 깜찍한 공녀가 떠나던 날, 새 공작 부인인 샬린에게 뺨을 맞고 나서 살벌한 저주를 내렸다지 뭐야. 공작에게 후계를 낳아 주지 못할 거라고. 딸만 낳는데 낳는 족족 죽을 거라고.”
사실도 섞여 있으나 더 무섭고 독하게 과장된 내용이었다. 본디 시스가 거의 무의식적으로 했던 예언보다는 이쪽이 훨씬 자극적이고 흥미롭다. 그러나 페르비아로서야 진실을 모르는 것이 당연했다. 그녀는 자신이 들은 대로 전한 거였다.
라무스는 아주 작은 동작이지만 고개를 가로저었다. 시스가 저토록 악독하게 누군가를 저주했을 리 없었다. 백 번 천 번 양보하여 그랬다 하더라도 남들이 알지 못할 내막이 있으리라. 라무스는 저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시스를 두둔하고 있었다.
“입에서 입을 타고 타고 날아다닐수록 눈덩이처럼 부풀려지는 게 풍문의 속성이죠.”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 애가 저주를 한 건 분명해. 옆에서 들은 사람들이 있다잖아. 하여튼 난 나이아시스를 이해해. 나라도 그랬을 테니까. 그런 식으로 당하고 어떻게 가만히 있겠어? 내릴 수만 있다면 저주라도 내려야지. 이 얘기를 들으면서 난 그녀가 궁금해지더라고. 나와 닮은 데가 있는 것 같아서 말이야.”
페르비아가 즐거운 듯 깔깔 웃었다. 라무스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지만 내심 반박했다.
천만에! 전혀 그렇지 않아. 시스는 너와 달라도 너무 달라. 넌 네 목적을 위해서라면 네 측근의 목숨도 아무렇지도 않게 빼앗는 냉혈 인간이잖아. 시스라면 절대로 자신을 위해 남을 괴롭히거나 희생시키지 않아.
“하여튼 난 이리투스와는 결혼 안 해. 이제 결투 준비가 됐으니까 채비를 차리는 대로 카푸로 가자. 이삼 일이면 충분할 거야. 이리투스는 이미 카푸에 있어. 오 년 전부터 쭈욱 말이야. 사실상 볼모 신세나 다름없지.”
카푸. 라무스는 입속으로 뇌어 보았다. 조만간 카푸에 입성하는 것이다. 생각지도 않았던 인물의 동행으로서. 단번에 카푸의 심장부인 왕성 안까지. 곰곰 생각해 보니 나쁘지 않은 방식이었다. 아니, 누군가 돕는 것처럼 순조로운 흐름이었다.
숲길이 절벽으로 된 외길로 바뀌었다. 마차가 두 대 정도 지날 수 있는 너비에 양 옆이 깎아지른 암석 벼랑으로 된 길의 길이는 어른의 걸음으로 약 180보 정도였다. 이 길을 지나면 다시 숲길이 나오고 거기에서 폴루스 니두스는 멀지 않다.
라무스는 후드를 깊숙이 뒤집어썼다. 지저분하게 흐트러져 내린 머리카락, 때 묻은 얼굴, 남루한 차림새, 십 년을 훌쩍 넘는 세월 때문에 그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을 테지만 신중을 기해서 나쁠 것은 없다.
“잘했어. 네 존재는 두드러지지 않을수록 좋으니까. 넌 성 끄트머리의 구석진 거처에 없는 듯이 있다가 나와 함께 출발할 거야. 그러니 지금부터는 어리숙한 떠돌이 기사 역할에 충실하도록. 내가 데려온 만큼 다들 함부로 관심을 보이진 못할 거야. 넌 내가 마을에서 주워온 새 장난감인 셈이고, 이런 일이 처음도 아니지. 지난 번 그치들은 다 가짜로 판명이 났어. 디위나 할멈이 보면 바로 알거든. 너도 오늘 밤에 바로 할멈한테 보일 거야. 하지만 난 조금도 염려스럽지 않아. 이번엔 진짜라는 걸 난 알아. 네가 바로 할멈이 예언한 그자라는 데에 난 내 아버지도 걸 수 있어.”
절벽 위의 길이 끝나고 숲길로 접어들자 물소리가 들려왔다. 폴루스 니두스를 둘러싼 해자를 흐르는 물에서 나는 소리였다. 정문으로 올 때 언제나 가장 먼저 맞아주던 차분하고 경쾌한 소리가 라무스에게 집에 돌아왔다는 가장 강렬한 실감을 안겨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