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예언가 디위나 할멈

by 화진


해자의 물은 계곡물에서 끌어오는데 물은 해자를 빙 돌아 마을의 경작지로 내려가도록 되어 있었다. 폴루스 니두스와 계곡물을 둘러싼 숲에는 수많은 고산늪이 흩어져 있었다. 덕분에 가뭄이 들어도 폴루스 니두스의 해자는 마르는 법이 없었다.


고산늪과 습지는 폴루스 니두스를 지켜주는 천혜의 방어막과도 같았다. 그 위치를 상세히 그린 지도는 유바론 가의 기밀이었다. 지도는 매년 갱신되었다. 지도 없이도 늪지대를 안전하게 지나다닐 수 있는 사람은 소수였다.


멋모르고 정문이 아닌 경로로 폴루스 니두스에 잠입하려는 시도를 했다가는 늪의 개흙에 빠져 생죽음하기가 쉬웠다.


“혹시나 해서 말해 두는데 성 밖의 숲으로 몰래 나가거나 그러지 마. 숨어 있는 늪이 많거든. 거기 빠지면 말이야, 늪 지도가 없는 사람은 구해 주고 싶어도 구하러 갈 수 없어.”


페르비아가 단속하는 말을 했다.


‘늪 지도도 가투스 라크리모의 손에 들어간 모양이군.’


예상 못한 바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라무스는 입맛이 썼다.


다행한 점은 라무스에게는 애초에 늪 지도가 필요치 않다는 점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폴루스 니두스 주위의 고산늪과 습지를 자유롭게 누비고 다녔다. 라무스의 몸에는 살리그네의 피도 흐르고 있었다. 태고의 버드나무숲에서도 길을 잃지 않는, 땅의 사랑을 받는 살리그네.


해자를 지나자 높게 둘러싼 성벽과 거대하고 육중한 성문이 나왔다. 성문은 예전과 같이 열려 있었지만 경비병의 수는 얼핏 봐도 예전의 다섯 배가 넘는 듯했다. 경비병들은 페르비아를 보자 공손한 태도로 양옆으로 도열해 길을 열었다.


성문 안으로 들어선 페르비아가 말에서 내렸다.


“푸실라. 가서 디위나 할멈과 도키를 데려오도록 해.”


성문 안쪽 마당으로 들어서자마자 페르비아가 명령했다. 푸실라는 작게 대답하고 잰걸음을 놓았다. 그녀는 이내 중정의 장미 무더기를 돌아 멀어졌다. 선홍색 꽃이 그 자리를 수놓고 있다는 게 라무스에게는 낯설고 어색했다.


장미, 장미라니. 오래 전에는 헬레보루스와 마가목이 많았던 정원이었다. 이 무렵은 마가목의 수수하고 하얀 꽃이 눈꽃처럼 흐드러지는 시기였다. 그 상쾌하고 은은한 향 때문에 누구나 지나치다 한 번쯤은 돌아보곤 했었는데.


“넌 이쪽이야, 와고르.”


어린 시절 뛰어놀던 마당에서 그리웠던 성과 정원을 눈에 담던 라무스는 페르비아의 말에 퍼뜩 떠돌이 와고르의 눈빛으로 돌아왔다. 페르비아가 자신을 어디로 데려갈지 짐작이 갔다. 성 뒤쪽의 구석진 데에 있는 헛간이리라. 유사시에는 병사나 하인들의 숙소가 되기도 하는 곳.


“들어와.”


페르비아가 거침없이 먼저 헛간으로 들어갔다. 라무스가 따라 들어가 보니 허름한 침대와 집기들이 얼추 갖춰져 있었다. 라무스는 페르비아가 서 있든 말든 개의치 않고 하나뿐인 의자에 걸터앉아 열린 문으로 바깥을 내다보았다.


“어디 출신이라고 했더라?”


라무스가 말하지 않았음을 알면서 페르비아가 물었다. 관심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왠지 침묵이 흐르는 것이 불편해서였다.


“자라기는 루나리아에서 자랐지요.”


“루나리아? 녹스 용병단의 요새 도시? 그럼, 녹스 용병이었어?”


대답이 없는 라무스를 문간에 선 페르비아가 알 만하다는 표정으로 보며 혼자 끄덕였다. 녹스 용병이었거나, 안식년 중인 현역 용병이거나, 심지어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살인자라해도 그녀에게는 상관없었다. 그녀가 원하는 역할만 완수해 주면 되는 것이다.


“거긴 고아들이 많다지? 먹는 입을 덜고 싶은 하층민들이 버린 아이들, 귀부인들이 몰래 내다버리는 남편의 서자들. 녹스 용병단에서는 알면서도 모르는 척 그 아이들을 거둬서 혹독하게 훈련시키고 용병으로 키우잖아.”


“잘 알고 계시는군요.”


“아버지와 아바루스 전하는 녹스 용병을 사고 싶어 하시지. 벌써 오래 전부터 흥정 중인데 그 파보르라는 작자가 말을 들어먹지를 않는다나 봐. 터무니없이 높은 값을 부르고, 말도 안 되는 조건들을 내걸면서 매번 튕긴다는군. 굉장히 괴벽한 인간인가 봐?”


페르비아가 소리 없는 코웃음을 쳤다. 파보르도 그리 오래 버티지는 못할 걸? 아바루스 전하께서 비장의 수를 준비 중이시니까.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그분의 괴팍함이라면 루나리아와 텔룸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지요.”


라무스가 파보르를 떠올리는 사이 바삐 걷는 발소리가 다가왔다. 그리고 뺨이 붉은 소년이 갈색 머리칼을 휘날리며 나타났다. 푸실라의 남동생 도키였다. 라무스는 후드를 살짝 들고 소년을 향해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도키는 페르비아에게 인사하고 얌전히 문 밖을 지켰다.


잠시 후 살집 좋은 노부인이 문 밖에 와 섰다. 디위나 할멈이겠군. 라무스는 낯빛을 바꾸어 정색한 채 그녀에게 작은 고갯짓으로 인사했다.


“어때, 할멈? 이번엔 내가 제대로 찾아 왔지?”


페르비아의 의기양양한 말투에 도키가 입을 헤벌리고 다시 라무스를 쳐다보았다. 디위나 할멈은 속내를 알 수 없는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안으로 들어왔다.


“뭐야? 설마 하니 이 자도 아니라는 거야? 그럴 리가 없는데? 뭐라고 말 좀 해 봐, 할멈.”


조급증이 나는지 페르비아가 신경질을 부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디위나 할멈은 가까이에서 시간을 들여 찬찬히 라무스를 뜯어보았다. 그러다 후드를 쓴 그의 머리에 손바닥을 대더니 화들짝 놀라 한 걸음 물러섰다.


“진짜 그분이시군요.”


놀라서 무심코 내뱉은 디위나 할멈의 말에 페르비아가 활짝 웃었다.


“역시 그렇지? 내가 확실하다고 했잖아.”


“잘 오셨습니다. 어쩌면 이 모두가 예비된 운명입지요.”


디위나 할멈의 연한 잿빛 눈이 라무스의 눈동자를 날카롭게 들여다보았다.


“그래서, 예언가 할멈. 내가 결투 기사로 나서면 운명적으로 반드시 이긴다는 거요? 어떤 상대와 맞싸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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