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 세상을 모르는 소년

by 화진


“의지만 확고하다면 그럴 것입니다. 능력이 미치지 못한다면 우연이 관여할 것이고, 암중공작이 있다면 반드시 폭로자도 있을 겁니다. 제 예지가 빗나가지 않았다면 말입니다.”


“할멈! 빗나갈 리 없잖아? 빗나가서도 안 되고!”


페르비아가 투정 섞인 핀잔을 놓았으나 디위나 할멈은 들은 체 만 체 돌아서서 총총히 가 버렸다. 그걸 보고 라무스는 디위나 할멈이 페르비아에게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있었다. 저 예언하는 할멈이 아마 이 못돼먹은 레이디가 거의 유일하게 너그럽게 대하는 사람일 것이다.


“와고르. 다시 한 번 말해 두지만 여기에 죽은 듯이 엎드려 있어. 넉넉잡아 이틀 밤만 얌전히 그러고 있으면 돼. 카푸로 떠날 준비를 최대한 빨리 할 테니까.”


엄격하게 말하던 페르비아가 시선을 문 바깥에 서 있는 도키에게로 돌렸다.


“착한 도키가 여기서 너와 함께 지낼 거고, 푸실라도 자주 들여다봐 줄 거야. 동생도 볼 겸해서 말이야. 자잘한 시중은 도키에게 시키고, 필요한 게 있으면 푸실라를 통해 내게 전해. 얼토당토않은 요구가 아니라면 들어줄 테니. 무슨 말인지, 알지?”


알아듣고말고. 내 처신에 도키와 푸실라의 목숨이 달려 있다는 걸 잊지 말라는 협박이잖아. 라무스는 능글맞게 대꾸했다.


“아주 잘 알지요.”


페르비아가 헛간을 나가자 도키가 눈치를 살피며 들어섰다.


“나는 와고르야. 도키, 손 좀 내밀어 봐.”


라무스가 짐 꾸러미를 뒤적이더니 무언가를 쥔 주먹을 내밀었다. 주먹손의 등만 보여 안에 뭐가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도키가 머뭇거리자 라무스는 안심하라는 듯 짐짓 우스꽝스러운 웃음을 보였다. 그러나 주먹 안에 뭐가 들었는지는 보여주지 않았다.


저 아저씨가 장난을 치는 거라 해도 이상한 장난은 아니겠다는 믿음이 생긴 도키가 두 손바닥을 모아 수줍게 내밀었다. 곧 도키의 얼굴에 소박한 기쁨이 피어났다. 작은 손바닥에 놓인 야생 자두는 빨갛고 향긋한 구슬 같았다.


“알은 작아도 잘 익었지? 나 같은 떠돌이들은 숲속에서 먹을 만한 열매를 발견하면 이렇게 비축해 두곤 하지. 먹어 봐.”


도키는 입술과 입가에 묻은 과즙을 싹싹 핥아 가며 두 개를 먹어 치웠다. 그러고는 두 개를 주머니에 넣었다.


“푸실라에게 주려는 거지?”


“누나를 알아요?”


“마을에서부터 함께 왔으니까. 얘기는 못 나눠 봤지만.”


“그럼 푸실라 누나가 왜 목을 다쳤는지도 알아요?”


심하지는 않아도 또렷한 상처였고 옷깃에도 피가 묻었다. 도키가 물었지만 푸실라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얼버무리고는 레이디 페르비아께서 기다리시니 얼른 가보라고 등을 떠밀었던 것이다.


“어…… 그게, 잘 모르겠는데. 숲길에서 발이라도 헛디딘 게 아닐까? 그 바람에 나뭇가지에 찔려서……?”


라무스는 적당히 둘러댔다.


푸실라가 도키에게 상처에 대해 정직하게 털어놓지 않은 까닭을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아직 어린 남동생이 알아서 좋을 것이 없다고 여겼을 테다. 누나가 섬기는 주인이 얼마나 무자비하고 무서운지. 또한 그런 일을 말거리 삼아 떠드는 걸 페르비아가 용납할 리도 없고.


도키는 머리를 갸웃갸웃했다. 푸실라는 민첩해서 험하고 가파른 길도 재바르게 잘 다니고 나무도 잘 탔다. 그런데 어쩌다가 발을 헛디뎠다는 건지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보다시피 나는 뭐든 혼자 하는 버릇이 든 떠돌이라서 시중 같은 건 필요 없어. 그러니까 도키 넌 그냥 편하게 있으면 돼. 가끔 말벗이나 해주면서.”


반신반의하는 표정이었지만 도키는 둥근 머리를 힘차게 한 번 끄덕였다.


“도키. 이 성에서 가장 높으신 분은 누구지?”


“그야 당연히 가투스 공이시죠.”


그럴 줄 알았으면서도 라무스는 기분이 씁쓸했다. 폴루스 니두스의 성주이자 시데레온의 영주인 테고 대공 즉 삼촌은 과연 유명무실한 허수아비에 불과한 건가.


“그럼 이 성에서 제일 예쁜 여자는?”


떠돌이 기사가 할 법한 질문이겠지. 라무스는 진짜 묻고 싶은 걸 묻기 전에 슬슬 판을 까는 중이었다. 궁금증 많은 뜨내기처럼.


이번에는 잠시 생각을 하던 도키가 작은 목소리로 소곤소곤 대답했다.


“대공비이신 레이디 카스티타.”


삼촌의 결혼에 대해서는 라무스도 알고 있었다. 여신처럼 아름답다는 카스티타는 라크리모 가문 출신이었다. 그러나 먼 친척이었고 일찍이 부모를 잃은 고아로 클레멘스 사제가 거두어 최초 신전에서 길러주지 않았다면 어떤 비참한 신세로 전락했을지 모른다.


“근데 그분은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세요. 그래도 무척 착하시죠. 비록 거의 매일 기도소에만 가 계시긴 하지만.”


무슨 말인가를 덧붙이려다가 도키는 입을 다물었다. 카스티타에 대한 페르비아의 신랄한 비평에 대해서였다. ‘그래 봐야 기도에 미친 촌스러운 시골뜨기일 뿐이야.’ 페르비아는 카스티타를 대놓고 무시했다. 도키는 입을 다문 스스로가 대견했다. 이 얘기는 안 하길 잘했어.


“그렇구나. 그럼 도키. 이 성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은 누구니?”


마침내 라무스는 자신이 몹시도 듣고 싶었던 얘기가 나올 만한 질문을 했다.


“나이는 엘리너 할머니가 가장 많을 걸요? 레이디 페르비아께서는 그녀를 버드나무의 유령이라고 불러요. 태고의 버드나무숲이 있는 게르미노 출신이고, 머리카락은 완전히 새하얗고 얼굴도 창백하고 주름살이 셀 수도 없이 많거든요. 어쨌든 여기 사람들은 다들 그래니라고 불러요. 나와 푸실라 누나는 카푸에서 왔기 때문에 그냥 엘리너 할머니라고 부르고.”


기대하고 기다렸던 말이었다. 아아, 그리운 엘리너. 그녀가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이 라무스의 가슴에 온기를 불러일으켰다. 보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먼발치에서라도 엘리너를 볼 수 있을까?


“이건 비밀인데요.”


비밀을 지킬 거냐는 뜻으로 도키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라무스는 그러겠다고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마주 걸었다. 도키가 생긋 웃었다. 아직 세상을 모르는 소년의 웃음. 한때 나도 저렇게 웃었지. 라무스가 도키의 머리를 장난스럽게 흐트러뜨렸다.


“사실은 난 엘리너 할머니가 좋은 사람인 걸 알아요. 어쩌다 마주치는 일이 있으면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거든요. 성에 행사가 있을 때면 남몰래 맛있는 것들을 보내주시기도 하고요.”


이전 05화125. 예언가 디위나 할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