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변해도 되는 것과 변하면 끝인 것이 있다. 폴루스 니두스의 정원이나 내부 장식 같은 건 변해도 되는 것이다. 서운한 감정이 들 수는 있어도 마음 자체를 다치지는 않는다.
그러나 엘리너라는 존재는 라무스에게 변하면 끝인 존재다. 만약 그녀의 사람됨이 라무스의 기억과 어긋나는 방향으로 변한다면 그녀는 더 이상 라무스가 사랑했던 엘리너는 아니게 되는 것이다.
라무스는 기뻤다. 엘리너가 변함없이 자신의 엘리너로 있어 주어서. 라무스는 비로소 집에 돌아온 편안하고 푸근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집은 단순한 장소가 아니다. 사랑하는 가족이 기다리는 곳이고, 따스한 기억이 살아 숨 쉬는 곳이다.
“네 말을 들으니 그분은 좋은 분인 것 같구나.”
반가움을 감추기 위해 라무스는 건성으로 도키의 말을 거들었다.
“제가 보기엔 와고르 님도 좋은 사람인 것 같아요. 지금까지 레이디 페르비아께서 데려오셨던 사내 중에 제일 친절하고 또 꾀죄죄하긴 해도 잘생겼고. 이전의 사내들은 뭐나 되는 듯 거들먹거리다가 디위나 님의 고갯짓 한 번에 곧바로 쫓겨나고는 했죠.”
도키가 엄숙한 자세와 표정을 하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천천히 한 번 가로젓고는 키득거렸다. 예언과 무관한 사내들을 향한 디위나의 행동을 흉내낸 것이었다.
날이 저물자 푸실라가 저녁 식사를 가지고 왔다. 그녀는 도키가 와고르 즉 라무스를 명랑하게 대하는 것을 보고 얼마간 마음을 놓는 듯했다. 도키가 라무스에게서 받아 남겨 놓았던 야생 자두 두 개를 내밀자 푸실라는 하나를 집어 가면서 귓속말로 주의를 주었다.
“나쁜 사람이 아니라 해도 저런 뜨내기를 믿어서는 안 돼. 정신 바짝 차려.”
아직 어리고 순수한 도키는 푸실라와 생각이 달랐지만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서 순순히 알겠다고 대답했다.
라무스를 흡족하게 여긴 페르비아의 특명으로 헛간의 저녁 식사가 꽤 훌륭했다. 덕분에 도키는 평소에는 구경도 못 하던 음식들을 배불리 먹고는 일찍부터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바닥의 낡은 카펫 위에서 잠든 도키에게 라무스는 기꺼이 침대를 양보했다.
열어 둔 창으로 익숙한 밤새 소리와 함께 이슬 맺히는 밤의 숲 냄새가 스며들었다. 이런 맑은 여름밤에는 개울로 작은 물고기를 잡으러 나가곤 했었지. 까맣게 잊은 줄 알았던 추억의 장면이 떠올랐다.
낭창낭창한 잔가지로 엮은 바구니를 개울에 빠트려 놓고 그 위에 횃불 빛을 비추고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고 알려준 사람은 토드 경이었다. 불빛에 이끌려 물고기들이 충분히 몰려들면 라무스는 날래게 바구니를 들어올렸다. 요리사의 아들인 콕토는 굽기 담당이었고.
콕토도 제 아버지를 닮아 요리에 재능이 있었어. 똑같은 물고기라도 콕토가 구워 주면 훨씬 더 맛있었으니까. 라무스의 상념은 어쩌면 자신이 저녁 식사로 먹었던 구운 송어가 콕토의 솜씨였을지도 모른다는 데에까지 뻗어나갔다. 그때였다. 누군가 헛간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연 라무스는 천만뜻밖의 인물을 마주했다.
“같이 한 바퀴 걷지.”
위엄은 있으나 스스럼은 없는 태도로 청하는 문밖의 손님은 바로 가투스였다. 라크리모 가문의 왕자, 현 왕의 든든한 아우, 시데레온의 자문관.
그의 얼굴을 모르지만 라무스는 그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처음 보는, 그것도 한참 낮은 신분의 떠돌이 기사를 찾아온 그의 의도는 전연 헤아릴 수가 없었다. 라무스는 겉으로 당황한 기색을 내보이고 속으로 스스로에게 위험을 경고했다.
“저어, 누구신지…….”
“가문에서 정해준 결혼 상대를 거부하는 딸을 둔 아버지이지.”
그는 보기 좋은 수염을 가볍게 쓸면서 치밀한 시선으로 라무스를 내리훑었다.
“아, 그러시다면, 가투스 공이시군요.”
라무스는 적합한 예를 갖췄다.
“그렇게 어려워할 것 없어. 디위나에게 들었다. 네가 페르비아의 바람을 이루어줄 거라고.”
가투스는 나오라고 손을 까닥이고는 걷기 시작했다. 라무스가 헛간을 나가서 보니 가투스를 따라온 거구의 호위병인지 기사인지가 있었다. 검은 갑옷과 투구까지 갖춘 호위의 손에 잡힌 장검의 서슬이 달빛에 번뜩였다. 그가 라무스의 등을 떠밀어 가투스와 나란히 걷게 했다.
“혹시 제게 무슨 분부라도 있으십니까?”
출세의 기회나 엿보는 한미한 기사로 보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살짝은 굽신대는 말투로 라무스가 물었다.
“공께서 썩 꺼지라고 분부하신다면 저는 아깝지만 기꺼이 그렇게 할 겁니다.”
“아니. 그럴 것 없어. 페르비아가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 카푸로 가서 결투 기사 노릇을 해. 하고, 반드시 이겨라. 내 딸이 바라는 대로.”
말문이 막힌 사람처럼 라무스는 입을 다문 채 가투스의 눈치를 살폈다. 이 자가 지금 나를 데리고 뭘 하는 걸까?
“그런데 말이야. 그 전에 그것보다 훨씬 큰 건이 있다면 맡을 의향이 있나?”
세모에 가까운 가투스의 예리한 눈이 라무스를 직시했다.
“훨씬 큰 건이라고요? 성공하면 무엇을 주실 겁니까?”
“뭘 원하나?”
“그게…… 영지를 원해도 됩니까? 떠돌아다니는 건 이제 싫증이 나서 말입니다. 아, 공께서 주실 수 있는 영지 중에 가장 작은 것이면 됩니다.”
이건 지나치게 욕심 많고 약아빠진 기회주의자 같았던 건 아닐까 생각하며 라무스는 가투스의 대답을 기다렸다.
“신속하고 깔끔하게 처리한다면야 감히 꿈도 꾸지 못할 영지도 줄 수 있지. 그 건이라는 게 다름 아닌 테고 대공을 제거하는 일이니까.”
삼촌을? 라무스는 놀랐지만 태연을 가장했다.
“공께서 결심만 확고하시다면 기회가 많았을 텐데 왜 이제 와서, 하필 저 같은 놈에게 시키시려는 것입니까?”
쇠모루에 망치질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느덧 대장간 가까운 곳까지 온 것이었다. 걸음을 멈춘 가투스의 입가에 은근한 미소가 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