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세에 능하군.”
조롱인지 칭찬인지 알 수 없는 말이었다. 가투스의 표정에서도 어느 쪽인지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다.
라무스는 가투스가 자신 못지않게 얼마든지 속내와 다른 가면을 써 보일 수 있는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가투스에 대한 파보르의 평이 떠올랐다. 아직 한 번도 이와 발톱을 드러내며 포효한 적이 없는 맹수. 직접 보니 파보르의 안목이 새삼 감탄스러웠다.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가 봐도 되겠습니까?”
돌로 쌓은 높은 벽을 계속 따라가 휘어진 모퉁이를 돌아 나가면 중정이 나온다. 가투스가 일부러 이 길로 자신을 데려온 것이 아닐까 싶어서 라무스는 중정 방향을 피하기로 했다.
“그래, 가 봐. 그런데 말이야. 폴루스 니두스를 네 마음껏 둘러봐도 되지만 뒷산 쪽엔 얼씬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숨은 늪이 많은 습지 산이라서 까딱 발 한 번 잘못 디뎠다간 산 채로 해골 되는 체험과 함께 세상과 영이별하는 수가 있으니까. 아, 이런 식으로 얘기하면 자신만만하고 호기심 충만한 젊은이는 오히려 더 가 보고 싶으려나?”
천연덕스럽고 매끄러운 말을 들으면서 라무스는 자신에 대한 그의 의심이 여전하다는 것과 그가 일부러 그 사실을 드러내고 있음을 깨달았다. 가투스는 넌지시 암시하고 있는 거였다. 설령 네가 진짜 라무스 유바론이라 해도 이번에는 널 보내줄 것이다, 라고.
“말리시는 건지 부추기시는 건지 헷갈리는군요.”
이 남자는 함부로 사냥에 나서지 않는구나. 기다리고 인내할 줄을 알기에 둘도 없이 위협적인 맹수다. 라무스는 궁금해졌다. 파보르는 가투스에 대해 어떻게 그토록 잘 알고 있는지. 친구를 아는 것처럼 적을 알라고 했지만 가투스는 파보르의 적이 아닌데.
“재미있는 소리를 하는군. 당연히 말리는 거다. 내 딸 페르비아를 위해.”
아리송한 미소와 함께 말한 가투스가 그만 물러가라는 손짓을 하고는 자리를 떴다. 그와 호위 기사가 중정 쪽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고 나서 라무스는 왔던 길을 되짚어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몇 걸음 못 가 도로 뒤를 돌았다.
뛰는 발소리가 있었다. 사람의 것은 아니었다. 말보다 가벼운 네 발이 내는 소리, 경쾌한 리듬. 라무스의 얼굴에 설핏 낭패감이 스쳐갔다. 개, 개들이 오고 있다. 탁 트인 곳이기는 하지만 개들의 목표물이 라무스라면 피할 도리는 없었다. 라무스는 단검을 단단히 쥐었다.
“컹컹, 컹, 컹.”
마침내 사람과 개가 서로의 시야에 드는 순간 맨 앞에서 달려오던 우두머리 개가 짖기 시작했다. 그러자 무리가 따라서 짖었다.
‘가투스. 이것도 역시 당신의 설계지?’
치밀한 자라고 생각하면서 라무스는 잔뜩 겁먹은 사람처럼 허둥거리며 큰 동작으로 팔을 뻗어 버둥버둥 했다. 열다섯 걸음 정도 되는 거리까지 다가온 우두머리 개와 라무스의 눈이 마주쳤다.
‘카니쿨라. 잊지 않았지?’
청색과 회색이 섞인 긴 털 사이로 우두머리 개의 눈이 흑요석처럼 번뜩였다. 개는 멈춰 서더니 자세를 낮춰 송곳니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렸다. 이 개들은 똑똑하고 용맹하기로 이름난 시데레온의 푸른 개였다.
‘카니. 잘했어.’
라무스는 눈으로 말하고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겁쟁이처럼 땅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쓰러졌다. 그러자 우두머리 개가 심드렁하게 몸을 돌려 천천히 뛰어갔다. 나머지 개들이 일제히 우두머리를 따라갔다.
그 틈을 타 라무스는 재빨리 가까운 나무를 타고 올라간 다음 돌벽 위로 옮겨가 자세를 낮추고 달렸다. 여차하면 바깥쪽으로 뛰어내릴 참이었다.
우두머리 개 카니는 얼마간 멀어지다 멈춰서 라무스가 있던 곳을 돌아보았다. 카니는 기억하고 있었다. 이건 주인과의 놀이였다. 어린 주인이 팔을 버둥거리는 척 수신호를 하면 카니는 으르렁대는 척을 하고. 주인이 엉덩방아를 찧는 체하면 카니는 무심히 돌아서 가고.
어린 주인이 이 놀이로 어른들을 기함하게 하고는 배를 잡고 웃던 걸 카니는 똑똑히 기억했다. 그런데 놀이의 규칙이 바뀌었나? 카니는 어리둥절해서 바람 속에 남아 있는 선명한 주인의 냄새를 들이마셨다. 이 놀이에는 반드시 후한 상이 뒤따랐었는데. 말린 산토끼 고기.
“카니, 카니. 갑자기 왜 그러는 거냐? 이리 오너라.”
고개를 좌우로 갸웃거리며 주인을 찾던 카니는 곧바로 부르는 목소리에 복종했다. 폴루스 니두스에서 개들의 훈련을 담당하는 루피누스의 목소리였다.
카니, 미안. 다음에 꼭 말린 산토끼 고기를 챙겨 줄게.
돌벽 위에 숨어 지켜보던 라무스가 입속말을 했다. 칼립스 단검과 마찬가지로 카니도 가투스의 시험일 터였다. 칼립스 단검은 쉽게 피했지만 카니는 꽤 조마조마했다. 카니가 주인과 재회한 기쁨과 흥분으로 놀이의 신호를 무시할까 봐서. 카니가 잊었을 리는 없다고 믿었으니까.
라무스는 그대로 돌벽에 눌러앉아 저만치 뛰어가는 개들과 그들을 부리는 루피누스를 바라보았다. 희붐한 달빛 속에 펼쳐진 흐뭇한 광경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한 다리와 한 팔이 불편하지만 누구보다 성실하고 개를 사랑하는 루피누스는 시간이 비껴간 듯 예전 그대로라 반가웠다. 이제는 나이든 개가 된 카니가 아직 우두머리 개의 위치를 지키고 있는 것도 기뻤다.
개들과 루피누스가 거처로 돌아가고서야 라무스도 자신에게 주어진 숙소로 갔다. 도키는 새근새근 잘 자고 있었다. 바닥의 해진 카펫에 드러누운 라무스는 대장간에서 가져온 단검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가투스의 시험은 끝이 아닐 터였다. 또 어떤 함정이 기다릴지 몰랐다. 페르비아가 옳았다. 이 헛간에 조용히 틀어박혀 있는 게 함정에 빠질 가능성을 줄이는 길인 것이다. 그러나 가투스가 그 꼴을 그냥 두고 볼까? 그럴 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