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 발설할 수 없는 것

by 화진


리마토가 인티무스를 배웅하러 나간 뒤 시스는 골똘한 사색에 빠졌다. 그녀는 자신을 둘러싼 일련의 의문들을 하나하나 차례로 짚어 보았다.


님파 라쿠스에 있는 루쿠스, 그 얼음 숲의 님페이아꽃에서 태어난 아니 발견된 아기. 미세르코리디아 공주가 들었다는 새벽의 여신의 신탁, 공주의 희생. 이그노스 대비와 클라비스 사제의 배려.


‘네 피의 맛은 굉장히 맑고 순연하다’고 했던 말리티아의 말. 청동 상자의 바닥에 나타났던 글귀. 솜다리꽃과 님파의 서. 오티움의 수장고 지하 석실의 벽화를 통해 보고 들은 것들, 느꼈던 것들.


꺼져가는 자신의 목숨을 붙들기 위해 반드시 찾아내야만 할 심장을 빌린 자 혹은 아이테르 산 상티모니의 심장꽃.


아! 그렇게 연결이 되는 건가? 시스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러니까, 천공의 언덕이 바로 신들이 머물렀었다는 말이 있는 아이테르 산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벽화 속 미지의 존재가 ‘심장을 되살려 붉은 꽃으로 피우리라’고 했으니 그 붉은 꽃이 바로 상티모니의 심장꽃과 같은 꽃인지도 모른다.


돌아온 리마토가 여러 번 헛기침 소리를 내고서야 시스는 시선을 들었다.


“일어나거라, 시스. 네가 편히 쉬기에는 여기보다 사크라테의 거처가 훨씬 나을 테지. 밤잠을 깨우면 괴물이 되는 사크라테라지만 너라면 괜찮을 게다. 사크라테는 널 좋아하니까.”


괴물이 된다는 건 그만큼 무섭게 신경질을 낸다는 의미였다. 사크라테는 이 건물 스키엔티아의 청소와 관리를 맡은 괄괄한 여자였다. 하는 일로 보면 사실상 하녀지만 신분상으로는 하녀는 아니었다. 사크라테의 아버지는 카푸로부터 추방당한 귀족이었다.


시스는 냉큼 몸을 일으켜 리마토와 함께 복도로 나왔다.


“여기서 최초 신전의 지시를 기다릴 것 없이 제가 카푸로, 신전으로 가야겠어요. 총장님께서 도와주세요. 네?”


어쩌면 최초 신전에서 아이테르 산과 관련된 단서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시스는 클라비스 대사제에게 물어볼 것이 많았다.


“거길 네 발로 가겠다고?”


리마토는 만류하는 어조로 되물었다. 그러나 단호한 결심이 서린 시스의 끄덕임에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내일 아침에 최초 신전에 널 데리고 가겠다는 전갈을 띄우고 출발하자.”


시스에게 시간이 많지 않음을 알게 된 리마토였기에 어떻게든 살 방법을 찾고 싶은 그녀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다. 여기 있다 도망칠 줄 알았는데, 원한다면 그럴 수 있도록 느슨하게 지키고 있으려 했는데. 스스로 최초 사원으로 가겠다니, 네 나름의 이유가 있을 테지.


“실은 총장님께 말씀 안 드린 일이 하나 더 있어요. 그런데 아무래도 지금 최초 신전을 대신해서 총장님께서 저를 감시하고 계시는 만큼 알려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또 무슨 일인 게냐? 예감이 꺼림칙하구나.”


“혹시, 이름 없는 헌신자들, 이라고 들어 보셨어요?”


아직 정보 매매상 콤메르조차 존재 정도나 알고 있을 뿐 정체는 파악하지 못한 집단이었다.


“이름 없는 헌신자들…… 그들에게 쫓기고 있다는 말을 하려는 거냐?”


리마토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예. 절 찾고 있다나 봐요. 역시 총장님께선 그들에 대해 들어 보셨군요. 그렇죠? 어떤 자들이에요?”


“우리도 아직 잘 모른단다. 워낙 비밀스럽게 움직이는 자들이라. 어쨌든 잘 말해 주었다. 카푸까지 가는 길에 비밀 호위를 요청해야겠구나.”


리마토는 이름 없는 헌신자들 쪽에서 시스를 찾는 까닭을 알 것 같았다.


시스가 열쇠 없는 자물쇠로 잠긴 청동 상자를 열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무도 들지 못하는 솜다리꽃을 들어올릴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가장 오래된 유물을 알아내고 그것과 교감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너일지도 모르겠구나. 우리가 기다리던 그 혹은 그녀가.’


내일 새벽에는 전서조를 여러 마리 날려 보내야겠다고 리마토는 생각했다. ‘우리’가 최초 신전에 모여 의견을 나눌 필요가 있겠다고.


“방금 ‘우리’라고 하셨잖아요. 그 ‘우리’는 누구인가요?”


“곧장 묻지 않기에 웬일로 그냥 넘어가 주나 했더니, 아니구나. 네가 나에게 발설할 수 없는 일이 있듯이 나도 그에 대해서는 발설할 수 없다. 하지만 만약 네가 우리에 대해 알아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면 그때는 속 시원히 말해 주마.”


어쩔 수 없이 시스는 궁금증을 마음 저편으로 접어 넣었다.


사크라테의 거처는 스키엔티아 뒤편의 구석진 곳에 있었다. 작지만 깔끔하고 튼튼한 오두막 앞에 시스를 남겨 두고 리마토는 무섭다는 시늉을 하며 발길을 돌렸다. 그는 멀찌감치 떨어져서 기다렸다.


시스가 오두막 문을 두드리고, 벼락같은 사크라테의 고함이 들려오고, 거칠게 문이 열리고, 사크라테가 깜짝 놀라 잠시 말을 잃었다가 시스를 와락 껴안는 것을. 시스가 등 뒤로 손을 흔들고는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다 지켜본 리마토가 늙은 어깨를 두드리며 돌아갔다.


다음날 시스는 카푸로 가는 길에 앙켑세라의 집에 들렀다. 날이 밝기도 전이었고 당연히 리마토도 함께였다. 리마토가 아래층의 손님 전용 식당에서 상큼한 오렌지 에일을 대접받는 동안 시스는 자신의 방에서 필요한 것들을 챙기며 앙켑세라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난번에 말씀드렸던 것들은 다 준비됐나요?”


얼마간의 금화와 은화, 카푸에서 시스가 지낼 곳, 시스가 필요할 때 돈을 융통할 수 있는 카푸의 업자 이름과 주소, 앙켑세라의 소개장과 지급 보증서 등. 인티무스의 집에서 만났을 때 부탁해 둔 것들이었다.


“준비는 됐는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길을 떠난다고? 심지어 리마토 총장을 대동하고? 이게 다 무슨 일인지 원.”


앙켑세라는 시스에게 자신이 모르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는 기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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