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나도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시스가 쓰게 웃었다.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사람치고는 너무 침착한데? 하기야 어떤 급박하고 위험한 순간에도 평정심을 잃지 말라고 가르친 건 나였다만.”
앙켑세라도 쓴입을 다셨다.
자신이 말했던 급박하고 위험한 순간이란 함께 일을 도모하다가 맞닥뜨릴 수도 있는 비상사태. 그러니까 남의 집에서 뭔가를 훔쳐내거나 가짜 신분으로 남을 속이거나 하다 들키는 경우를 뜻했다. 그럴 때 평정심을 유지하면 위기를 모면할 임기응변을 짜내는 데 도움이 되니까.
그러나 지금 시스를 보고 있자니 그런 정도의 상황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보다 근원적이고 치명적인 문제에 휘말린 듯했다. 앙켑세라의 직감과 본능이 스스로를 향해 경고를 보냈다. 한 발 물러서. 어차피 도울 수 없는 문제야.
“침착한 척 행동하는 게 도움이 돼요. 그런 생각을 심어줘서 고마워요, 레이디 앙켑세라. 전에도 말했던 것 같은데 일 년이에요. 그 안에 내가 돌아오지 않으면 내가 남긴 모든 건 당신 거예요. 어디 좋은 곳을 찾아서 마침내 마음 내키는 대로 살고 있구나, 그렇게 생각해 줘요. 아, 이건 너무 상투적인 작별의 말인가? 안 들은 것으로 해줘요.”
시스는 민망하다는 도리질했다.
“좋아. 안 들은 것으로 해줄게.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줘. 네가 준비해 놓으라던 것들 갖다 줄 테니.”
앙켑세라는 여느 때처럼 건조하게 말하고 시스의 방을 나갔다. 그러고는 문을 향해 중얼거렸다. 그래 너는 필시 다시 돌아올 거야. 네가 얼마나 악착이인지는 내가 제일 잘 알지.
시스는 짧게 자르고 어두운 색으로 염색한 머리에 맞춰 남자 옷으로 갈아입기로 했다. 전에 앙켑세라와 함께 일할 때 변장을 위해 입었던 것이 옷장에 몇 벌이나 있었다.
남장을 하고 나타난 시스를 본 리마토는 순간적으로 입을 떡 벌리며 놀랐지만 이내 좋은 생각이라는 의견을 냈다.
두 사람이 집 앞에서 기다리던 마차로 돌아가니 마부가 바뀌어 있었다. 오티움에서 앙켑세라의 집으로 올 때 마차를 몰았던 오티움 소속의 나이 지긋한 남자 칼로가 아니라 젊은 여자가 마부석에 앉아 있었다.
후드와 두건으로 얼굴과 머리를 가렸지만 시스는 그녀가 자신처럼 남장을 한 여자라는 걸 알았다. 그녀는 말없이 눈인사만 건넸다. 리마토가 요청한다던 비밀 호위였다. 비밀 호위는 마차 안에 한 명이 더 있었다. 마부석의 여자와 흡사한 모습이었고 역시 말이 없었다.
“이들이 데아 세쿠토인가요?”
덜컹거리며 달리는 마차 안에서 시스가 나직나직 리마토에게 물었다. 리마토는 말없이 눈꼬리를 조금 휘었다. 마차 안의 데아 세쿠토는 눈빛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채 조각상처럼 앉아 있었다.
데아 세쿠토는 여신의 기사였다. 최초 신전에서 길러내는 신비의 살수로 존재를 드러내는 일이 지극히 드문 자들이었다. 이들은 철저히 묵언의 계율을 지켰고 이름이 없었다. 평범한 인간에서 데아 세쿠토로 거듭나는 순간 이름을 버리고 아무도 아닌 자가 되는 것이다.
카푸까지 가는 동안 다행히 마차는 별다른 접근이나 공격을 받지 않았다. 시스는 자신이 거기에 타고 있다는 걸 이름 없는 헌신자들이 몰랐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낯선 마부가 데아 세쿠토임을 눈치챘거나.
최초 신전은 카푸의 북동쪽 외곽에 있었다. 마차는 검박하지만 웅장한 석조 정문 앞에 멈춰 섰다. 이 석조 정문을 아풀게오라고 부르는데 서광이 비친다는 뜻이었다.
아풀게오는 마차나 말을 타고 들어갈 수 없었다. 아무리 신분이 존귀해도 걸어서 정문을 통과해야 했다. 마찬가지로 가장 천한 신분이어도 걸어서 들어갈 수 있는 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존귀하든 천하든 대사제의 허가 없이는 아풀게오를 통과할 수 없다.
시스와 리마토가 마차에서 내리자 마부석의 데아 세쿠토가 독특하고 강렬한 휘파람 소리를 냈다. 그러자 누군가 안쪽에서 육중한 문을 열어 주었다.
최초 신전 안은 무척 넓었다. 시스와 리마토는 문을 열어준 두 명의 사제를 따라 한참을 걸어 대사제인 클라비스가 기다리는 본당에 도착했다.
정면의 벽에 새벽의 여신의 거대한 성상이 부조로 조각되어 있었다. 돌을 네모나게 깎아 쌓은 벽 위에 다시 조각을 돋을새김으로 한 것이었다. 사방의 높은 창에서 드는 빛이 여신의 얼굴을 환하게 비추었다.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있던 클라비스 대사제가 몸을 일으켰다.
“무사히 오셨군요.”
흰 사제복을 입은 클라비스가 말했다. 그녀는 키가 작았고 머리카락은 온통 은백색이었으며 얼굴에는 부드러운 인상을 주는 주름이 완연했다.
“오티움 근처에 잠복해 있던 데아 세쿠토 덕분입니다.”
리마토가 공손하게 머리를 숙였다.
“총장님께서는 오늘은 이만 숙소로 나가셔서 쉬십시오.”
최초 신전의 중요한 손님이 머물 수 있는 숙소는 신전 바깥에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알겠습니다. 대사제님.”
시스를 향해 온화한 눈인사를 보낸 리마토는 조용히 물러갔다.
“잘 자랐구나.”
클라비스가 시스에게 가까이 다가오더니 짧은 머리카락을 의아한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어두운 색으로 물들였습니다. 변장을 하려고…….”
“그랬구나. 내 기억에 의하면 머리카락 색이 반짝이는 등황빛이었어.”
“맞습니다.”
“전서조가 가져온 편지에서 읽었다. 청동 상자와 그 안에서 나온 솜다리꽃과 나타났다 사라졌다는 글귀에 대해. 그게 네 손에서 이루어진 일이라는 것도.”
“일어날 일이 일어났다는 듯이 말씀하시는군요. 왜 저입니까? 아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단언할 수는 없지만 네가 루쿠스의 님페이아꽃에서 나온 아이라서겠지. 신탁에 의해 미세르코르디아 공주에게 맡겨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