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가 기대했던 대답이 아니었다. 시스는 진실을 원했다. 표면에 입혀진 신비와 신탁의 껍데기 말고 이면 깊숙이 감추어진 배경과 의미를 알고 싶은 거였다.
“그 얘긴 저도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제가 듣고 싶은 건 인간들 가운데 여신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계시는 대사제님만이 주실 수 있는 답입니다.”
“들어서 알고 있다고 했느냐?”
클라비스는 놀라움을 솔직하게 드러냈다.
“파르티케.”
시스는 아무것도 재지 않고 망설이지도 않았다.
“파르티케? 그녀가 아직 살아 있느냐? 어디에 있지?”
연민과 반가움으로 클라비스의 동공이 부드럽게 확장됐다. 시스는 미세하게 그리고 느리게 머리를 흔들었다.
“저에게 전하라고 누군가에게 맡겨 둔 유언을 얼마 전 우연한 계기로 들을 수 있었습니다. 파르티케가 숨을 거둔 지는 십 년쯤 된다고 합니다.”
“그랬구나. 가련한 파르티케…….”
여신의 상을 향해 돌아선 클라비스가 무릎을 꿇고 두 손을 자신의 심장 위에 포갰다.
“여신이시여, 파르티케의 충직한 영혼에 여명을 비추어 주소서.”
클라비스가 눈을 감고 새벽의 여신에게로 돌아가는 자를 위한 침묵의 기도를 올리는 동안 시스도 애도하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이윽고 클라비스가 일어나 시스의 앞으로 돌아왔다.
“대사제만이 줄 수 있는 답을 듣고 싶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당사자인 저에게는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좋다. 요정의 호수에서, 얼어붙은 신성한 섬에서, 님페이아꽃에서 온, 부모에게서 나지 않은 자의 요구에 새벽의 여신을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섬기는 대사제 클라비스가 응하겠다. 지금부터 우리가 여기서 나누는 말은 여신의 이름으로 봉인될 것이다. 받아들이겠느냐? 맹세하겠느냐?”
“받아들이겠습니다. 여신께 맹세합니다.”
시스의 결연했고 클라비스는 엄숙했다.
클라비스는 시스를 뒤쪽에 있는 기도석으로 데려가 나란히 여신을 향해 앉았다. 다리나 몸이 불편해 여신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없는 이들을 위해 마련된 자리였다. 그러나 여신은 이해할 것이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길어질 테고 여신은 자비로우니.
“너에 관한 첫 신탁은 바로 이곳에서 내려왔다. 이 대사제가 들었지. 여신께선 속삭이셨다. 님파 라쿠스의 주인이 긴 잠에서 깨어날 것이다.”
“님파 라쿠스의 주인이라고요? 제가요?”
호수를 금단의 괴물 같은 곳으로 만들고 숲을 얼음으로 뒤덮어 버린 게 나라고? 시스는 믿을 수 없었다. 뭔가 착오가 있었던 게 아닐까?
“여신께서 네게 주신 이름 나이아시스는 까마득히 멀고 먼 옛날 님파 라쿠스에 머물던 물의 요정들 중 하나인 나이아스에게서 따온 이름일 것이다. 그러니 여신께서 틀리지 않으셨다면 적어도 너는 님파 라쿠스의 주인들 가운데 하나라고 보는 게 맞겠지.”
“물의 요정들이라고요? 그럼 나이아스 말고 다른 요정들에게도 이름이 있습니까?”
“나이쿠스, 리리오페. 그렇게 들었다.”
“그렇게 들으셨다는 건 신탁을 뜻하시는 겁니까?”
시스는 입속으로 나이아스, 나이쿠스, 리리오페, 라고 불러 보았다. 별다른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저 모르는 이름일 뿐. 시스의 마음속에서는 이건 말이 안 된다는 외침과 대사제와 신탁이 거짓을 말할 리 없다는 외침이 대립했다.
“물의 요정들의 이름은 신탁으로 안 것이 아니다. 너에 대한 신탁이 있기 한참도 전에 스피리티에게서 들었지. 몹시 강한 신성을 지니고 태어난 강신 사제였다.”
클라비스는 스피리티를 만나자마자 알 수 있었다. 그 소녀가 자신을 이어 대사제가 될 재목이라는 것을. 스피리티는 그 누구보다 특별한 능력을 지닌 강신 사제였다. 그런 면의 능력만 놓고 보자면 이미 대사제인 클라비스를 한참 능가했다.
“다만 그때는 반신반의했었다.”
“그토록 강한 신성을 가진 강신 사제가 한 말인데 왜 반신반의했다는 겁니까?”
“그 아이는 아홉 살이었고 아직 정식으로 여신의 품에 입문하기 전이었으니까. 그 시기에 눈앞에 비쳐 보이거나 귀에 들리는 것들에는 헛것이 섞여 있다. 정식으로 신전의 일원이 되어 수련하고 연마해야 헛것을 분별하고 걸러내는 힘이 생기지.”
“그럼 그분은 이곳의 수도원에 계시겠군요?”
“아니. 여기에 없다. 그 아이는 수도 신관이 되기를 거부하여 입문 절차가 개시되기 직전에 도망쳐 버렸다.”
불행히도 스피리티는 자신의 능력을 버거워하고 괴로워했다. 그녀는 신묘한 만큼 조숙하고 예민한 소녀였다.
스피리티는 아직은 미숙한 자신의 신묘함을 본격적으로 일깨우는 것을 꺼리고 두려워했다. 아무하고도 공유할 수 없는 그 세계에는 밝음보다 어둠의 전언이 많았고, 알고 있어도 막아줄 수 없는 비극이 허다했다.
“고작 아홉 살에…… 대단하군요.”
그 어린 나이에 수도 신관을 거부하는 큰 결심을 하고, 최초 신전의 수도원에서 도망치는 큰 모험을 했다면 당사자로서는 정말이지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거겠지. 시스는 아홉 살의 스피리티를 응원하고 싶었다.
“그만큼 뛰어났고 또 순수했으니까.”
창으로 드는 햇빛의 각도가 바뀌었다. 이제 서쪽의 창으로 들어오는 빛이 벽면의 새벽의 여신의 얼굴을 연한 분홍빛으로 물들였다. 돌에 새겨진 여신의 눈매가 그윽해졌다. 태양이 어느 각도에 있든 그 각도에 있는 높은 창으로 빛이 들어 여신의 얼굴에 닿게 설계되어 있었다.
“미세르코르디아 공주가 솜다리 여관으로 갔던 것도 신탁을 따른 것이었습니까?”
잠시 둥근 내부의 높은 창들을 세어 보던 시스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그것도 신탁이 아니다. 내가 부탁했다. 나는 일찍부터 미세르 공주가 흰 꽃으로부터 아이를 안아 올리는 장면을 예지하고 있었다. 님파 라쿠스에 대한 신탁을 받기 전까지는 그저 평범하게 미세르 공주의 앞날에 결혼과 후사가 있으리라는 예언이라고 여겼었다가 그 신탁을 받고서야 비로소 알았지. 나의 예지는 님파 라쿠스의 주인을 루쿠스로부터 데리고 나올 운명이 미세르 공주의 몫임을 보여주는 거였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