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는 얼마 동안 눈을 내리뜬 채 궁리에 잠겨 있었다. 여전히 그녀의 안에는 답보다 의문이 많았다.
타키툼의 사제 클레멘스에게서 시스는 중요한 한 가지를 배웠다. 여신의 사제도 필요에 따라 남을 속인다는 것을. 클레멘스는 숙연하고 천연덕스럽게 시스의 옆에 가짜 신랑을 세워 놓고는 결혼의 성립을 선언했었다.
물론 사제들 중 대부분은 정직하고 양심적이겠지만 예외가 클레멘스 한 사람도 아닐 터였다. 대사제라고 예외가 아니라는 보장도 없을 테고. 그렇다고 시스가 클라비스 대사제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그저 시스는…… 아무리 해도 납득할 수가 없는 것이다.
“물의 요정의 재림이라고요? 저는 아무래도……. 그러니까 어디에선가 무언가 착오가 생겼을 수도 있는 일이잖습니까. 제가 정말 미세르 공주가 루쿠스에서 데려온 그 아이라고 확신하십니까?”
“그거야…….”
그 말이야말로 말도 안 된다는 듯 클라비스의 눈썹이 살짝 찡그려졌다.
“저는 죽어가고 있습니다. 대사제님을 만나고 싶었던 것도 그것 때문입니다. 죽고 싶지 않아서, 살고 싶어서. 어떻게든 살아남을 방법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재림한 물의 요정이라면, 이렇게 쉽게 죽어갈 리가 없지 않습니까? 이렇게 평범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클라비스는 소스라치게 놀라 시스의 손을 잡고 얼굴을 가까이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금빛 눈에서 연민과 수심이 따스하게 일렁였다.
“무슨 일이냐? 어째서 너에게 그런 일이 생긴 거지?”
시스를 포르미두사의 공작 가에 맡기면서 클라비스 대사제와 이그노스 대비는 시스가 순탄하게 살아가기를 바랐다. 그녀 안의 요정의 본성이 깨어나는 일이 없기를, 선량하고 현명한 페로니아 공작 부인의 영향 아래 그늘 없이 평안한 인간의 삶을 누리기를.
“흑주술입니다.”
왼팔의 소매를 걷어 올린 시스가 검은 점과 거기에서 뻗어 나온 검붉은 선을 보여주었다.
“내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면 너는…… 내년 여름을…….”
클라비스는 표식을 알아보았다.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사악하고 강력한 마가 혹은 마구스가 이런 죽음의 표식을 남길 수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또한 인간이 아닌 선하고 강력한 존재가 죽음의 시기를 지연시켰다는 사실도.
“내년 여름을 맞지 못하겠지요.”
“누구지? 누가 너에게 이런 끔찍한 짓을 했느냐?”
“말리티아, 레이디 다피넬 프레케스의 어머니라고 했습니다.”
이름을 말하면서 시스는 자연히 꿈마녀 라멘타를 떠올렸다. 결국 이렇게 말리티아를 최초 신전에 고발해 달라던 그녀의 바람이 이루어지는구나.
“다피넬 프레케스의 어머니? 어떻게 그럴 수가…….”
“제가 보장하건대 레이디 다피넬은 말리티아의 흑주술과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다피넬은 말리티아를 뼛속 깊이 증오하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녀의 아들인 데세르티온 공작은 말리티아와 공모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아…… 이런. 널 그런 사람들에게 보냈다니. 하지만 우린 네가 잘 지내기를 바랐단다. 프레케스 공작 가의 인품에 대해서는 클레멘스 사제가 장담을 했으니까.”
“프레케스 가에 대해서는 더는 언급하고 싶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말리티아가 흑주술을 쓰는 마가라는 사실이니까요.”
시스와 데세르의 결혼은 왕명으로 진행된 것이었다. 따라서 결혼을 무효화하는 것 역시 아바루스 왕의 권한이었다. 시스는 오늘이든 내일이든 클라비스 대사제에게 부탁할 작정이었다. 아바루스 왕을 만나게 해달라고.
“말리티아라는 이름의 마가가 나타났단 말이지. 음,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내 앞으로 익명의 제보가 들어왔었지. 고래 산맥의 웬투스 고원, 마물들의 폐허라고 불리는 곳을 조사해 보라는 것이었지. 불온한 무리가 모여든 것 같다고.”
콤메르는 과연 거래에 있어 확실하고 깔끔한 사람이구나. 시스는 콤메르가 신속하고 정확하게 약속을 지켰다는 사실을 알았다.
클라비스는 직관적으로 두 사안이 무관하지 않을 거라는 예감을 받았다. 마물들의 폐허에는 어둡고 강렬한 기운이 깃들어 있으니 마가나 마구스 들이 악의 힘을 증폭하고 응축하기 위한 장소로 쓰기에 적격이다.
“그래서, 조사를 명하셨습니까?”
“데아 세쿠토를 파견했다. 그건 그렇고. 시스 네가 날 만나러 온 까닭을 알겠구나. 아까 네가 말했었지. 죽고 싶지 않다고. 살고 싶다고. 그거, 맞지?”
클라비스는 미안하다는 듯 시스의 눈을 피했다.
“강신의 능력을 지닌 대사제도 사람의 생사를 마음대로 어쩌지는 못한다. 요정에 대해서라면 더더욱 말할 것도 없고.”
“그건 알고 있습니다. 대사제님께 저를 살려달라는 부탁을 드리려는 게 아닙니다. 단지 몇 가지 여쭤 보려는 겁니다. 그러니 알고 계시는 것이라면 꼭 대답을 해주십시오.”
“말해 보아라.”
“심장을 빌린 자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상티모니의 심장꽃에 대해서도요. 먼 옛날 신들의 거처였다는 아이테르 산이 지금의 어디인지도요. 제가 살기 위해 기댈 수 있는 것들은 이 세 가지의 비밀뿐입니다.”
셋 중 하나는 여신의 대사제인 클라비스가 실마리를 쥐어줄 수 있는 것이었고 둘은 아니었다. 클라비스는 결심했다. 그들에게 데려가야 해. 이 아이가 둘 중 어느 쪽이라 해도 이렇게 죽어가게 둘 수는 없는 일이야.
“내가 혼자서 다 답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니다. 너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이들에게 지금 바로 전갈을 넣겠다. 밤에 그들이 오면 다시 이야기하자.”
“그들이 누구입니까?”
“이그노스 대비와…….”
머뭇거리는 클라비스의 눈이 비밀스럽게 빛났다.
“미세르 공주.”
“예? 그분께서는 분명 돌아가셨다고……?”
시스는 너무 놀라 앉은 자리에서 튕겨 오르듯이 일어났다.
“살아 계신다. 다른 이름, 다른 신분으로. 우린 너에게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건만, 넌 기어코 이렇게 돌아와 우리를 한 자리에 소환하는구나. 마치 운명이 시킨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