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 님파 소로르

by 화진


클라비스는 시스를 자신의 처소로 데려갔다. 대사제의 처소는 사제관의 가장 높은 층에 있었으며 내부 통로 뿐 아니라 후면의 외벽에 붙어 있는 돌계단으로도 출입할 수 있었다. 계단에는 돌로 쌓은 높은 난간이 둘러 있어 은밀히 지나다니기에 좋은 구조였다.


본당과 사제관 뒤쪽의 우묵하게 들어간 지점에 식료품 저장실이 있었다. 그 건물 뒤로는 최초 신전 전체를 둘러싸는 높은 담이 있고 담 너머는 숲이 우거진 산이었다.


대사제의 처소는 작은 침실과 넓은 홀로 이루어져 있었다. 홀에는 기다란 탁자와 작은 탁자가 있었고 책장과 안락의자도 있었다. 책장 옆에 색색의 돌과 모래, 조개껍질의 가루로 새벽의 여신을 그린 모자이크 성화가 걸려 있었다. 최초 신전만큼이나 오래된 그림이었다.


사방에 난 창으로는 최초 신전의 전체 경치를 볼 수 있었다. 시스는 창문을 하나하나 따라다니며 바깥 풍경을 주의 깊게 새겼다.


신전 자체가 하나의 마을과 비슷했다. 채소와 곡식을 가꾸는 농경지와 염소를 기르는 농장과 과수원과 통나무 속을 비워 만든 벌통들이 있었다. 그리고 곳곳에 우물이 있었다. 농경지나 농장에서 일하는 사제들의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사제들이 입은 회색이나 검은색 옷도 여름의 풍성한 녹음과 금빛 석양 속에서는 그리 칙칙해 보이지 않았다. 사제들은 일체의 대화도 웃음도 없이 일하고 있었지만 왠지 모를 경쾌한 활기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들 사이를 떠다니는 곤충이나 새들의 소리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래도 어떤 사제들에게는 감옥 같을 거야.’


시스는 생각했다. 지향과 성향과 마음가짐에 따라 이곳은 가장 안전한 집일 수도 있고 지긋지긋한 감옥일 수도 있겠다고. 시스 자신으로 말할 것 같으면, 후자 쪽이었다. 시스는 누군가가 정해주는 좁은 범위 안에서만 사는 건 싫었다. 물리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저녁을 먹기에는 조금 일렀으나 클라비스가 식품 저장실에 가서 간단한 먹을거리를 챙겨왔다. 조용하고 단출한 식사를 마치자 클라비스는 모자이크 성화 앞에 무릎을 꿇었다. 기도인지 묵상인지는 오래 계속되었다. 시스는 책장에서 양피지로 묶은 고서를 꺼내 펼쳤다.


원래 그런 것인지 미리 얘기를 해 둔 것인지 아무도 대사제를 찾아오지 않았다. 클라비스는 이따금 두 손을 심장에 모은 채 이마를 바닥에 대고는 시스가 알지 못하는 입속말을 웅얼거렸다. 시스는 여신을 찬미하는 옛날의 시와 그림이 들어 있는 책을 건성으로 느릿느릿 보았다.


날이 저물고 종루에서 종소리가 들려왔다. 한여름의 늦은 저녁 시간을 알리는 것이었다. 클라비스가 마침내 몸을 일으켰다. 시스는 그들이 올 시간이 되었음을 예감했다. 바깥의 기척에 귀를 쫑긋하고 있은 지 얼마나 되었을까, 클라비스가 바깥 계단으로 통하는 문으로 갔다.


문이 열리고 두 여자가 들어왔다. 검은 옷을 입은 노부인이 이그노스 대비, 잿빛 옷을 입고 중년과 초로의 사이쯤 되어 보이는 쪽이 미세르 공주였다.


두 사람이 이토록 빠르게 올 수 있었던 건 가까이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그노스 대비는 거의 일 년 째 최초 신전과 가까운 별궁에서 지내고 있었다.


클라비스와 그녀들은 서로 간단히 묵례만 주고받고 곧장 시스에게로 왔다. 시스는 묵묵히 정중한 인사를 올렸다.


“원래는 등황빛의 아주 아름다운 머리카락이에요. 변장을 했나 봐요.”


이그노스가 시스의 짧고 색이 어두운 머리를 보며 미세르에게 속삭였다. 미세르는 시스가 머리카락이 나지 않은 갓난아기 때 본 게 마지막이었다. 따라서 자신이 얼음 숲 루쿠스에서 데리고 나온 아이의 머리색과 생김새를 미세르는 잘 알지 못했다.


“님페이아꽃의 아가야…….”


미세르는 감격스러운 듯 손을 뻗어 시스의 볼을 쓰다듬었다.


시스는 속으로 두 번 깜짝 놀라고 말았다. 우선은 탁하고 꺽꺽거리는 이상한 목소리 때문에. 그 다음으로는 다정한 손에 박인 딱딱한 굳은살이 느껴져서. 그러고 보니 얼굴 또한 검게 그을고 잡티가 잔뜩 올라와 얼룩덜룩했다. 공주가 아니라 하녀 같은 모습이었다.


“아아, 이거? 나는 미세르코르디아가 아니라 솔리타니까. 최초 신전의 하녀 솔리타. 주로 염소를 돌보고 과수원 일을 하지.”


시스의 놀람을 짐작한 미세르가 두 손을 보여주며 설명했다. 신전의 하녀로 살아온 세월이 시스의 나이와 같았다. 이제는 공주로 살았던 시절이 오히려 꿈처럼 아스라했다.


“어떻게……. 무슨 말씀인가 하면…… 분명히 돌아가셨다고 들었거든요.”


호감 어린 눈빛을 한 시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미세르는 그 눈빛을 읽고 기쁘게 미소했다.


“그래, 거의 그렇게 됐었지. 아바루스가 나의 죽음을 의심하지 않을 정도로. 하지만 우린 미리 약간의 준비를 해 두었단다. 그렇지요, 이그노스?”


“그랬지요, 미세르. 거기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는 게 좋겠네요. 아, 그 전에 먼저 우리가 누구인지부터 알려 주고요. 내가 말할까요?”


이그노스가 이렇게 묻는 것은 미세르가 말을 할 때 다른 사람보다 몇 배는 힘이 들기 때문이었다. 미세르는 목에 단검을 찔렀던 것 때문에 목소리를 내는 기능에 손상을 입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줘요.”


네 여자는 작은 탁자에 모여 앉았다.


“나와 미세르는 님파 소로르의 일원이란다.”


이그노스가 시스를 보며 고백했다.


“요정의 자매단이라는 뜻이지.”


“님파 소로르…… 요정의 자매단?”


처음 듣는 낯선 이름에 시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여자들만 모인 비밀 모임이고 외부인에게 정체를 드러내서는 안 되지만 대사제님께는 그때 그 미세르의 죽음 사건 때 예외적으로 말씀드리지 않을 수가 없었지. 그리고 시스 너는.”


“아마도.”


시스가 끼어들었다.


“님파 라쿠스의 루쿠스에서 왔으니까, 애초에 님파 소로르에 속한다는 뜻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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