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 나이아스와 알리페르

by 화진


“그런 셈이야.”


이그노스의 입에서는 수긍의 말이 나왔지만 그녀의 눈은 착잡한 빛을 띠었다.


“그런 셈이라면…… 다른 해석이 있을 수도 있다는 거잖아요. 그렇죠?”


“그래, 그런데. 이 얘긴 조금 뒤로 미루자. 그래도 되겠지?”


시스는 어쩔 수 없다는 몸짓으로 동의했다.


“그럼 다시 미세르의 이야기로 돌아가지. 마침 그 일이 있던 무렵에 왕궁에는 내 손님이 있었단다. 나의 친척 자매 프리틸라 살리그네였지. 우리 살리그네의 딸들은 첫 아이를 고향인 게르미노에서 낳는 전통이 있지. 프리틸라는 게르미노에서 낳은 아들이 한 살이 되어 시데레온으로 돌아가는 길에 잠시 들렀던 거야. 그녀는 시데레온의 대공비였거든. 또한 님파 소로르의 장로이고.”


프리틸라 대공비에 대해서는 시스도 주워들은 바가 있었다. 라크리모의 가보를 훔쳤다는 죄목, 그녀의 남편인 아세르 대공의 죽음, 아들의 실종, 현재 그녀가 게르미노로 돌아가 있다는 것 등등.


방금 전까지만 해도 시스에게 프리틸라는 세간의 소문과 앙켑세라의 비평 속 인물일 뿐이었다. 그랬던 프리틸라가 시스의 삶으로 들어왔다. 나뭇잎을 흔드는 바람처럼, 바위를 안고 도는 물살처럼. 자연스럽고도 우연하게.


“아바루스가 미세르를 추궁하기 위해 부르기 전에 나와 미세르는 다급하게 프리틸라를 찾아가 의논을 했다. 미세르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불을 보듯 뻔했으니까. 프리틸라는 기꺼이 미세르를 위해 자신이 가진 요정의 축복을 내어주겠다고 했단다. 그건 님파 소로르의 장로가 일생에 단 한 번만 쓸 수 있는 주술이었는데. 물론 그 힘을 쓰기 위해서는 다른 소로르들의 조력이 있어야 하지만.”


“그 요정의 축복이라는 주술로 미세르 공주를 되살렸다는 말씀이세요?”


“되살린 게 아니라 죽음을 유예한 것이지. 프리틸라는 곧바로 주술 의식을 시행해 주었다. 나와 미세르가 그녀를 도왔고, 미세르에게는 죽음을 유예하는 주술이 걸렸어. 그래서 아바루스 앞에서는 죽은 사람으로 보였지만 진짜로 죽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입은 상처는 진짜였고 회복하는 데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단다. 네가 들었다시피 말하는 능력은 완전히 회복되지 못했고.”


이그노스는 미세르의 시신 수습과 장례 준비를 자신이 맡겠다고 나섰다. 그렇게 미세르를 빼돌리고 클라비스 대사제에게 도움을 청했던 것이다.


“나는 두고두고 후회하고 있단다.”


미세르가 힘겹게 목소리를 내어 말하면서 시스를 보았다. 미세르의 얼굴에 자책과 괴로움의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프리틸라가 나에게 쓴 그 요정의 축복은 그녀의 남편이나 아들에게 쓰였어야 옳았어. 그런데 웃기는 건, 지금은 이렇게 후회하지만 그 당시의 나는…… 젊었던 나는, 어리석었던 나는…… 죽기가 싫고 억울했단다.”


눈물이 미세르의 뺨을 적셨다. 미세르의 고통의 근원은 그녀가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하고 오직 여신에게만 고해하고 용서를 구할 수 있는 순간들에 있었다.


투명한 이슬을 비추는 아침 햇살. 갓 태어난 새끼 염소가 스스로 일어나 어미의 젖을 먹는 모습. 구석진 땅에 떨어진 씨앗에서 어엿하게 자라 여물어가다 발견된 귀리 이삭. 어느 무덥던 날 갑자기 불어와 땀을 식혀주던 선들바람과 빗줄기 등등.


그런 순간들을 만나면 무심결에 순수한 감동과 미소가 미안함이나 괴로움을 밀어내고 마음의 전면으로 치고나왔다. 그러고 나면 미세르는 다시 존재의 고통에 빠졌다. 그때 죽었어야 한다고 후회하면서도 무심코 눈앞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마는 모순의 인간으로서.


이그노스가 손을 뻗어 미세르의 등을 다독였다.


“나중에 프리틸라에게 그런 불행한 일이 생길 줄을 그때는 몰랐잖아요. 그리고 요정의 축복 주술을 행하기 전에 프리틸라가 말했잖아요. 만약 미세르가 그 축복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면 효과가 없을 거라고. 요정의 축복은 스스로 수혜자를 고른다고요.”


“살고 싶은 마음은 잘못이 아니잖아요.”


그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시스가 말했다. 모두의 눈이 일제히 시스에게 모였다. 다들 황급히 상기했다. 자신들이 이 자리에 모인 까닭을. 시스가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대사제님이 보낸 쪽지에 네가 듣고 싶어 하는 중요한 답을 우리가 해줄 수 있을 거라고 적혀 있었다. 아마 우리 님파 소로르만이 아는 비밀에 관한 것이겠지. 말해 보렴. 아는 대로 숨김없이 알려줄 테니.”


물 잔을 들어 입술을 축인 이그노스가 시스를 유심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심장을 빌린 자에 대해 알고 싶어요. 상티모니의 심장꽃과 아이테르 산에 대해서도요.”


“아이테르산에 대해서는 대사제님께서 말씀해 주실 게다. 상티모니의 심장꽃은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다는 꽃이지만 지금은 티토니아의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어. 우리 님파 소로르가 아는 건 심장을 빌린 자에 대한 것뿐이야.”


“심장을 빌린 자가 누구인가요? 누구로부터 심장을 빌렸다는 건가요?”


가장 오래된 유물이 있다는 동굴 석실에서 본 환시를 생각하며 시스가 물었다. 조바심에 저도 모르게 말이 빨라졌다.


“알리페르. 빌렸다기보다 나이아스가 주었다고 한다. 알리페르가 나이아스를 위해 자신을 희생했기 때문에.”


“자세히 얘기해 주세요.”


“구체적인 상황은 전해지지 않는단다. 물의 요정 나이아스는 믿었던 인간에게 속임을 당했고, 알리페르는 그녀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인간들에게 내주었다고 하더구나. 나이아스의 언니 중 하나인 리리오페가 나이아스를 요정의 호수로 데리고 돌아갔고, 나이아스는 절망과 슬픔과 분노에 빠져 자신의 심장을 알리페르에게 주어 알리페르를 살리고는 소멸했다고 한다. 그런데 소멸 직전에 나이아스는 자신의 영혼을 분노와 연민으로 나누어 루쿠스의 얼음 속에 봉인했다더구나.”


“분노와 연민이라고요?”


둘로 나누었다고? 시스는 혼란스러워졌다.


이전 14화134. 님파 소로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