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난 둘 중 어느 쪽이라는 거야?’
시스는 굳이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여기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런 시스를 안쓰럽게 여긴 미세르가 가만히 손을 잡아 주었다. 이그노스가 시스에게 대답했다.
“그렇게 전해진다. 분노와 연민, 둘이라고. 그리고 우린 몰라. 네가 어느 쪽인지를. 우리 님파 소로르는 어느 쪽이든 네 안의 그것이 깨어나지 않기를 바랐고, 바라고 있다. 네가 계속 이렇게 보통의 인간으로서 살아가기를 말이다. 기왕이면 행복하게.”
“만약 제가 분노라면, 그것이 깨어난다면, 세상의 앙화가 될 거라는 뜻이로군요.”
사이사이 틈을 두면서 천천히 말하는 시스의 미간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녀는 곤란한 듯 보이기도 하고 서글픈 듯 보이기도 했다.
“아까 제가 애초에 님파 소로르에 속해 있나 보다고 했을 때 왜 석연찮게 그런 셈이라고 말씀하셨는지 이제 알겠어요. 거기에 속한다기보다 지켜봐야 하는 대상이었던 거예요.”
마지막에 덧붙이려던 말을 시스는 목 안쪽으로 삼켜 버렸다. 분노인지 연민인지, 라는 말.
“그럼 님파 소로르라는 비밀 결사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나요? 뭔가 지향하는 목표라든지 목적 같은 게 있을 테지요?”
물의 요정 나이아스가 분노로 재림할 때를 대비해서? 앙화를 제거할 목적으로? 혹은 연민으로 재림한 요정을 보호하기 위해? 아니지. 둘 다일 거야. 시스는 자신이 하나마나한 질문을 했음을 깨달았다.
“우리에게 사명으로 전해지는 건…… 요정 리리오페의 당부라는, 선량함과 연약함으로 고귀한 것을 지키라는, 그리 명확하지도 구체적이지도 않은 말이란다. 그래서 우리는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남몰래 돕곤 했지. 그들 가운데 운 좋게 우리 눈에 띈 사람들, 님파 소로르가 드러나지 않게 도울 수 있는 사람들을.”
하지만 이그노스도 미세르도 막연하게 느끼고 있었다. 진실로 님파 소로르가 사명을 다해야 하는 날이 닥쳐온다면 그때에 자신들에게 주어질 역할이 무엇일지.
“연민이야말로 사람이기 때문에 가지는 선량함과 연약함으로 고귀한 마음의 작용일 테지요. 하지만 나는 분노도 연민도 요정도 아니에요. 난 그냥 나예요. 인간 나이아시스.”
시스의 말에 이그노스는 생각했다. 아직까지는.
“그리 좋은 사람으로 살아오진 않았지만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친 적도 없어요. 그러고 싶지도 않고요. 그런데도 말도 안 되는 나쁜 일을 겪었고 죽어가고 있죠. 난 그냥…… 살고 싶어요. 이런 나로, 계속.”
우는 것은, 특히 남들 앞에서 우는 것은 질색인 시스였지만 어쩐 일인지 눈에 의지를 거스른 눈물이 차올랐다. 이건 너무 부당해.
“그래서 전 심장을 빌린 자를 만나야 해요. 알리페르 말이에요. 아니면 상티모니의 심장꽃을 찾든지요. 도와주세요. 지금의 저는 님파 소로르가 도와줄 수 있는, 어려움에 처한 한 인간일 뿐이니까요.”
“말했잖니. 상티모니의 심장꽃은 세상에 없다고. 이젠 상티모니 일족과 심장꽃이 실존했었는지조차 불분명해. 상티모니는 아이테르 산에 있었다고 하는데 아이테르 산 자체를 찾을 수가 없으니. 알리페르도 마찬가지야. 우린 심장을 빌린 자의 이름이 알리페르라는 것을 알 뿐, 어디에 가야 만날 수 있는지는 알지 못한단다. 다만, 알리페르라는 신수가 머물 만한 곳이라면 인간들의 땅은 아닐 거라는 추정 정도만 할 뿐이지. 바로 아이테르 산 같은 곳 말이다.”
마지막 말을 하면서 이그노스는 눈을 들어 클라비스 대사제를 건너다보았다. 신들의 거처였다는 아이테르 산에 대해 뭔가를 아는 사람이라면 클라비스 대사제 말고 또 누가 있겠는가 하는 뜻으로.
시스는 가장 오래된 유물을 찾아갔을 때 본 환시 속 알리페르의 말을 기억해냈다. ‘나는 천공의 언덕에서 태어난 자’라고 했었지.
“혹시 아이테르 산을 천공의 언덕이라고도 불렀습니까?”
“네가 어떻게 그걸 알고 있느냐? 신들의 세계에 속하는 존재들만이 자신들이 머무는 곳을 그런 식으로 일컬었다고 알고 있다.”
클라비스는 조금 놀라면서 뭔가를 생각하는 눈빛으로 고개를 갸우듬히 틀었다.
최초 신전에는 대사제에게서 대사제에게로 전해지는 고문서가 있었다. 석판이나 점토판으로 된 그 문서들은 대사제 이외의 사람들에게는 아무것도 없는 돌이나 흙덩어리일 뿐이었다. 거기에 새겨진 것들은 대사제로서의 의식을 치른 사람에게만 보였다. 그것도 단 사흘 동안만.
대사제에게 꼭 그 고문서들을 봐야 하는 의무 같은 건 없었다. 안 보고 넘어가도 대사제로서의 권위와 위엄 그리고 직의 수행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그 고문서를 안 본 대사제는 없었다. 클라비스가 천공의 언덕이라는 말을 본 것도 그 고문서에서였다.
“아이테르의 신들이나 신수들의 표현인 거군요. 제가 가장 오래된 유물에서 알리페르의 환시를 봤을 때 들었던 말입니다.”
묵묵히 듣기만 하던 미세르가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표정이 되어서는 탁하고 긁는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오티움의 가장 오래된 유물이 알리페르가 너에게 남긴 실마리였나 보구나. 네가 그의 환시를 보고 소리를 들었다니, 필시 그가 널 부르고 있는 거야.”
“그렇다면 심장을 되돌려주려는 거겠지.”
이그노스가 중얼거렸다. 그녀의 낯빛에 수심이 번졌다. 심장을 돌려받으면 진짜로 물의 요정 나이아스가 돌아오는 건가? 그렇다면 그 다음엔? 이그노스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아무도 모르는 일인 것이다. 아마 시스조차도.
“요정의 심장, 그럼 전 살 수 있겠네요? 죽지 않아도 되겠네요? 그렇죠?”
희망에 찬 시스가 낸 밝은 목소리의 여음이 돌벽으로 둘러싸인 넓은 방을 미끄러지듯 휘돌다 고요히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