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적이 흘렀다. 시스는 아마도 알리페르였을 환시 속 존재의 말을 구체적으로 옮겼다.
“알리페르가 말했어요. 천공의 언덕으로 돌아가 심장으로 붉은 꽃으로 피우겠다고. 그러니 아이테르 산을 찾아서 그를 만나겠어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계속 침묵을 지키는 동안 정적이 시스의 귀가 아닌 마음에다 속살거렸다.
아이테르 산은 찾고 싶다고 찾을 수 있는 장소가 아니야. 너와 알리페르가 만남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알 수 없어서 두려워. 하지만 우리에겐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지. 널 이대로 죽어가게 둘 수는 없으니.
“그 누구도, 어떤 방법으로도 널 막을 수 없겠구나.”
이윽고 클라비스가 정적을 깼다. 그녀는 오래 전에도 같은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수도 신관이든 대사제든 그런 건 되고 싶지 않다고, 자신은 떠날 거라고 말하던 어린 스피리티에게.
“아이테르 산은 신들이 지상에 둔 별궁이었다. 땅 위에 있으나 땅 위에 있지 않은 천공의 언덕이지. 내가 말해줄 수 있는 건 아이테르 산으로 통하는 길을 와쿠움이라고 부른다는 것과 와쿠움은 정해진 위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허락된 자의 앞에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정도다.”
“정해진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모습을 드러낸다……. 그 말씀은 아이테르 산이 우리가 걸어서 갈 수 있는 현실적인 산이 아니라는 말씀이군요.”
결국 또 막다른 길과 수수께끼인가. 방금 전에 푸르게 부풀어 올랐던 시스의 희망이 서리 맞은 풀처럼 시들거렸다.
“미안하구나. 고작 이 정도밖에 말해주지 못해서. 하지만 네가 아이테르 산을 찾기를 간절히 원하고 알리페르가 널 만나고 싶어 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결국 와쿠움이 네 앞에 나타나거나 널 제 앞으로 데려갈 것이다.”
“그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는 뜻이군요.”
“네가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들을 하라는 말이다. 지금껏 그래 왔듯이.”
클라비스는 믿었다. 시스가 여기까지 온 것처럼 스스로 알리페르에게 이르게 되리라고.
“그럼, 청동 상자 건으로 여기 갇혀 있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이십니까?”
시스의 목소리에 활기가 돌아왔다.
“그건 아니다. 형식적으로 그리고 대외적으로 넌 최초 신전의 감시와 보호를 받는다. 네가 어딜 가든 나 아니면 내 명을 받은 사제나 데아 세쿠토가 함께일 게다. 그러나 단 한 곳만은 우리도 따라가지 못하겠지. 아이테르 산.”
한쪽 눈썹만 슬쩍 밀어 올렸다 내리는 클라비스의 은밀한 신호를 시스는 즉시 이해했다. 대사제는 시스를 도우면 도왔지 걸림돌이 되지는 않으리라.
“제일 먼저 할 일은 프레케스 가와의 악연을 깨끗이 정리하는 것입니다. 제 결혼에는 명백하고도 중대한 프레케스 가의 기망 행위가 있었습니다. 그러니 대사제님. 저와 함께 아바루스 전하를 만나 주시겠습니까?”
클라비스와 이그노스, 미세르가 똑같이 아연한 낯빛으로 탄식했다.
“결혼의 무효를 주장하겠다는 거니?”
셋이 거의 동시에 물으려 했지만 이그노스 대비가 가장 빨랐다.
“그렇습니다.”
“어쩌면 어려운 일도 아니겠구나.”
이그노스의 말투에 서린 냉소는 아들인 아바루스를 향한 것이었다. 내 아들은 이 소식을 반길지도 몰라. 저 아이를 다른 귀족에게 다시 팔아먹을 수 있게 되었으니.
*
다음날은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라무스는 내내 거처에 틀어박혀 있었다. 도키가 있어서 심심하지는 않았다. 라무스는 도키에게 검 잡는 법과 손질하는 법을 가르쳐주었으나 도키는 검에 흥미가 없었다.
도키가 좋아하는 놀이는 따로 있었다. 도키가 창가에서 손가락에 빗물을 묻혀 벽에다 그림을 그려 보여주자 라무스는 깜짝 놀랐다. 자신의 얼굴을 똑같이 그렸던 것이다. 도키는 그림에 재능이 있었다.
“텔룸에는 화가들이 많고, 화가들을 후원하는 고상한 취향의 부자들도 많다고 하던데, 와고르 님도 텔룸에 가봤어요?”
“가 봤지. 네 말이 맞아. 도키 너는 텔룸으로 가서 그림을 배우면 좋겠구나.”
“그럴 일은 없어요. 나와 누나는 레이디 페르비아의 소유이니까요.”
도키는 아무렇지도 않게 손사래를 쳤다. 꿈꿔 보기도 전에 체념을 배운 아이의 해맑음에 라무스는 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도키.”
때마침 푸실라가 왔다.
“푸실라 누나.”
도키가 반가워하며 푸실라를 안으로 잡아끌고는 망토에 묻은 빗물을 털어 주었다.
“이거 받으세요, 와고르 님.”
푸실라가 망토를 걷고는 안고 온 보퉁이를 내밀었다. 라무스는 말없이 받아서 풀어 보았다. 새 옷이었다. 번듯한 기사의 복장. 라무스는 푸실라에게 의아한 눈길을 던졌다.
“가투스 공의 분부예요. 그걸 입고 가투스 공의 저녁 식탁에 나오시라고요.”
라무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새 옷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떠돌이 기사 따위를 저녁 자리에 초대하다니. 이상해. 아니 찜찜해.
“때가 되면 사람이 올 거예요. 저 말고 다른 사람이요. 전 이만 돌아가 볼게요. 도키가 잘 지내는 것 같아서 마음이 놓여요.”
전날보다 한결 편안해진 기색으로 말한 푸실라는 도키의 헝클어진 머리를 손으로 빗어주었다. 그러고는 망토와 후드를 여미고 곧장 돌아갔다.
“우와!”
도키가 라무스의 새 옷을 만져보며 천진하게 좋아했다. 라무스는 눈을 가늘게 뜬 채 골똘한 생각에 잠겼다.
‘칼립스 단검을 못 알아본 척했고, 옛 주인을 알아본 개 카니를 내가 가르쳤던 놀이를 이용해 따돌렸는데도 가투스는 나에 대한 의심을 다 거두지는 않았어. 그는 나를 삼촌과 엘리너의 앞에다 앉히려는 거야. 이게 가투스의 세 번째 함정이구나.’
이번 함정은 너무 위험했다. 가투스는 라무스를 삼촌과 엘리너의 앞에 데려다 놓으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