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무스가 궁리하고 궁리하는 동안에도 비는 그치지 않고 내렸다. 빗줄기가 가늘어지고 구름의 잿빛이 연해질 때쯤 어둠이 찾아와 모든 풍경을 집어삼켰다. 곳곳에 횃불이 내걸리고 창문들이 운향꽃 색의 불빛들로 들어차자 저녁 식사 시간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피하거나 숨을 수는 없었다. 가투스를 상대로 그런 어쭙잖은 일을 벌이는 것은 자신이 유바론임을 자백하는 짓이나 다름없었다. 라무스는 자신의 운수를 시험해 보기로 했다. 페르비아가 데려왔던 디위나라는 할멈이 진짜 예언자라면 이 위기도 어떻게든 모면할 수 있을 터.
철벅이는 발자국 소리와 함께 라무스를 데려갈 자가 왔다. 어제 가투스를 따라왔던 범상치 않은 호위 기사였다. 오늘도 갑옷에 투구에 면갑까지 갖추고 있어 얼굴은 볼 수 없었다. 그래도 이상할 정도로 번들거리는 두 눈만은 언뜻언뜻 들여다보였다.
“갔다 올게, 도키.”
의자에서 일어나는 라무스의 팔꿈치를 도키가 잡아당겼다.
“옷, 옷이요.”
침대 위에 놓아둔, 가투스가 보낸 새 옷을 도키가 가리켰다. 갈아입으라는 말이었다.
“괜찮아. 내 옷을 입고 못 들어가는 자리라면 안 들어가고 말지.”
양손의 등에 감았던 천을 풀던 라무스는 ‘이 옷이 어때서?’ 하는 뜻으로 팔을 벌리고 자신의 옷을 쓱 일별했다.
“정말 그냥 그렇게 가도 괜찮을까요?”
라무스의 두 손등을 가로지르는 흉터를 보고 놀라던 도키가 문 밖에서 가랑비를 맞으며 기다리는 호위 기사의 눈치를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호위 기사가 검집을 들어 새 옷을 향해 뻗었다. 그러나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사양한다니까. 나는 떠돌이 기사지 광대가 아니야. 아직은 남의 옷을 입고 귀족들의 우스갯거리가 될 만큼 타락하지는 않았거든.”
라무스가 망토를 걸치고 문을 나섰다. 호위 기사의 거대한 몸이 그를 막아섰다. 호위 기사가 검을 들지 않은 다른 손으로 새 옷과 라무스를 번갈아 가리켰다.
“분명히 말해 두는데 내 옷을 입고 가지 못할 자리라면 차라리 가지 않겠다니까?”
라무스는 문간에 주저앉아 버렸다. 저 호위 기사가 자신을 어찌하지는 못하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저 기사는 당연히 검술과 전투 능력이야 최고겠지만 주인의 명령을 받지 않고는 결코 그것을 증명할 수가 없는 부류인 것이다.
“내가 저녁 식사 자리에 늦어서 높으신 분들의 기분이 상한다 해도 그건 나를 막아서서 못 가게 한 너 때문인 거야. 그건 확실히 하자고.”
검은 갑옷을 입은 호위 기사의 몸이 살짝 움찔했다. 그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막았던 길을 텄다.
폴루스 니두스는 희읍스레한 비안개에 잠겨 있었다. 라무스는 길을 알았지만 모르는 척해야 했으므로 호위 기사의 뒤를 느긋하게 따라갔다.
“이봐. 호위 기사. 이름이 뭐야?”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페르베아투에서 왔겠지? 가족과 고향이 그립지 않나?”
이번에도 묵묵부답. 그러고 보니 어제도 목소리를 들은 기억이 없었다. 심지어 주인인 가투스에게조차 오로지 행동으로만 복종했었다. 라무스는 저 호위 기사의 침묵이 단순히 과묵해서는 아니라는 인상을 받았다. 역시 명령 때문일 것이다. 어떤 말도 하지 말라는 명령.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명령권자로서도 불편할 때가 있지 않나?’
라무스는 의문이 들었지만 자신이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식당으로 들어서니 아니나 다를까 다들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길고 커다란 식탁의 상석에 테고 대공이. 젊고 멋진 삼촌은 간 데 없고 연륜과 피로감이 쌓인 삼촌이 앉아 계시군.
상석의 왼쪽 첫째 자리에 가투스. 근엄한 체하고 있지만 은근히 즐기는 눈빛이야. 그의 옆에 페르비아. 저 못마땅한 표정은 내 옷차림 때문이겠군. 상석의 오른쪽 첫째 자리에 대공비 카스티타. 과연 굉장히 아름답지만…… 왠지 망연해 보이는데.
삼촌의 뒤편에 엘리너가 눈을 살짝 감고 서 있었다. 은발은 예전보다 숱이 적어졌고 전에는 짚지 않던 지팡이를 짚었지만 라무스가 그리워하던 그 엘리너였다.
라무스의 자리는 상석에서 가장 먼 측면의 말석이었다. 수많은 횃불과 촛불이 모든 이의 얼굴을 환하게 비추었다.
“와고르라고 합니다. 미천한 놈을 불러 주셔서 영광입니다.”
두 손을 들어 지저분한 머리를 대강 쓱쓱 훑은 라무스가 깍듯이 인사하고는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그가 내보일 수 있는 가장 음침한 인상을 한 채로.
“감사 인사는 가투스 공의 몫이지. 나는 너 같은 떠돌이 따위에게 볼 일이 없으니까.”
테고는 대놓고 불쾌감을 드러냈다.
“대공께서는 너그러이 양해하시오. 나도 어쩔 수 없는 아버지라오. 귀여운 딸이 소원하는 바를 외면하지 못하는.”
겉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가투스는 라무스를 향한 테고와 엘리너의 반응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와고르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엘리너 할멈은 좀 놀라는 것 같던데? 아무래도 그건 잃어버린 도련님 생각이 나서겠지?”
가투스가 엘리너를 자극해 보았다.
“그야 우리 도련님께서 살아 계신다면 저 떠돌이와 비슷한 또래일 테니까요.”
엘리너는 가투스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고개를 들고 눈을 뜨더니 라무스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늙어서 눈이 침침해진 탓인가, 닮아 보이는 것도 같고…….”
흠칫하며 눈을 비비던 엘리너가 라무스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지팡이 소리가 똑 똑 바닥을 울렸다. 라무스는 최대한 비굴하고 불순한 미소를 떠올리려 애쓰면서 두 손으로 식탁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페르비아가 눈을 동그랗게 부릅뜨고 제 아버지를 돌아봤다.
‘이게 무슨 일이죠? 설마……?’
가투스는 그저 구경이나 하라는 눈짓을 할 뿐이었다.
‘그럴 리 없어.’
페르비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만약 그렇다면 디위나가 먼저 알았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