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 테고의 맹세를 요구하다

by 화진


“대공 전하.”


한가운데쯤에서 잠시 멈춘 엘리너가 테고를 불렀다.


“왜 그러나, 엘리너?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가?”


테고의 목소리에서 묻어나는 긴장감이 가투스에게 은밀한 즐거움을 주었다. 가투스는 궁금했다. 조카가 돌아오기를 바라기 때문일까, 바라지 않기 때문일까?


“미리 한 가지 맹세를 해주실 수 있습니까?”


“무슨 맹세를 시키려는지 짐작이 가는군. 설마 엘리너는 저 지저분한 떠돌이가 진짜 라무스인 줄로 아는 건가?”


“아닐 수도 있겠지만 맞을 수도 있으니 저로서는 만약을 대비하는 안전장치를 해 두지 않을 수가 없지요.”


페르비아가 가투스의 소매를 당겼다. 그녀는 절대 그럴 리 없다는 자신만만한 얼굴이었다. 가투스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가능성은 반반이야. 어쨌든 재미있지 않느냐?”


재미있는 상황인 건 사실이었다. 페르비아는 아버지의 소매를 놓고 와인 잔을 들었다.


엘리너가 엄중하게 말을 이었다.


“대공 전하. 만약 저 자가 정말 라무스 도련님이 맞는다면 즉시로 대공의 위를 도련님께 돌려주시겠다고 맹세하십시오.”


“맹세는 어려운 일이 아니야. 하지만 그렇게 되면 시데레온은 페르비아투 왕국이 쫓는 현상 수배범을 대공으로 둔 나라가 돼. 여기 가투스 공께서 라무스를 페르베아투로 연행하겠지.”


테고가 가투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렇지 않소?


“아바루스 전하의 명이 그러하니…….”


어쩔 수 없다는 듯 가투스가 말끝을 흐렸다. 실제로 아바루스는 살아 있는 라무스를 원했다. 재생과 번영의 피리가 라무스의 손에 있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가투스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라무스가 아바루스의 손에 들어가기 전에 없애 버릴 작정이었다. 가투스는 전설의 피리니 하는 것에 관심이 없었다. 실상 가투스가 원하는 것과 아바루스가 원하는 것 사이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아바루스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을 테지만.


“그건 그때 가서 걱정할 일이지요. 우선은 맹세를 해 주십시오.”


엘리너가 재촉했다. 대공의 지위만 돌려받는다면 페르베아투 왕의 명령이 무슨 소용이람. 시데레온의 백성들이 가만있지 않을 텐데. 그토록 기다려 온 진정한 시데레온의 별을 목숨 걸고 지키려 들 텐데.


“좋아. 맹세하지. 저 자가 내 조카 라무스라면, 내 기꺼이 그를 시데레온의 적법한 대공으로 받들지. 그런데 엘리너. 뭘 믿고 그렇게 자신만만한가? 저 자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아낼 무슨 비책이라도 있다는 건가?”


“예, 있지요. 저는 도련님을 낳으신 레이디 프리틸라의 유모였습니다. 게르미노 출신이지요. 제 아비는 살리그네 가문의 묘지기였고요.”


엘리너의 아버지가 살리그네 가의 묘지기였다는 것은 이 자리의 다른 사람들은 물론이고 라무스조차 몰랐던 사실이었다. 살리그네 가의 묘는 태고의 버드나무숲 안에 있었다.


“어디 보자……. 가까이에서 봐도 생긴 건 비슷한 데가 있어.”


라무스의 앞에 멈춘 엘리너가 지팡이는 들어 올리고 식탁에 몸을 기대고는 노려보다시피 강렬한 시선으로 그를 관찰했다.


“그렇다면 제대로 확인을…….”


엘리너가 얼굴을 숙였다. 그녀의 귀가 라무스의 가슴팍에 바싹 가까워졌다. 라무스는 질색하며 의자를 뒤로 빼며 물러앉았다.


‘아아 엘리너, 이러지 마. 알아봤어도 못 알아본 것으로 해 달라는 신호를 그렇게 보냈건만. 내 신호가 너무 모호하고 희미했나?’


라무스는 식당에 온 이래로 의도적으로 계속 자신의 손등 상흔을 노출하는 행동을 했다. 토드 경이 어머니의 지시로 냈던 그 상흔에 대해 삼촌이나 엘리너가 알 거라는 기대가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나 토드 경이 어떻게든 알려 줬을 거라고.


상처는 라무스가 피리 부는 자라는 것을 일정 기간 감춰주는 것이 첫 번째 목적이었지만 훗날 그를 찾기 위한 표식도 되었을 테니.


“해치지 않아. 그러니 얌전히 있게, 젊은이.”


엘리너가 지팡이의 둥글게 굽은 손잡이로 라무스의 뒷목덜미를 잡아챘다. 라무스는 순순히 끌려가 주면서 눈으로 필사적인 호소를 보냈다. 안 돼, 엘리너. 제발 아니라고 해. 엘리너가 귀를 라무스의 심장에 대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안 들려.”


실망감이 역력한 엘리너가 몸을 바로 했다. 그러고는 지팡이로 라무스의 가슴을 쿡쿡 찌르며 말했다.


“넌 우리 라무스 도련님이 아니야. 도련님은 피리 부는 자로 태어났어. 숲의 노파가 확인해 줬지. 태고의 버드나무숲 복판에 있는 옹달샘에 어린 아기였던 도련님을 목욕시킨 다음부터 나는 들을 수 있었어. 라무스 도련님의 심장에서 들리는 피리 소리를. 너는 아니야. 피리 부는 자 즉 플라토르가 아니야.”


“플라토르?”


테고와 가투스가 거의 동시에 중얼거렸다.


“재생과 번영의 피리가…… 사람이었다고?”


가투스가 실소했다. 재생과 번영의 피리인가 뭔가가 진짜로 있었다? 그런데 그게 사람이다? 그것도 라무스 유바론?


“라크리모 가에서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면 플라토르이신 우리 도련님과 그 가문의 가보라는 피리는 전혀 다른 존재일 테지요.”


엘리너가 회심의 비웃음을 날렸다. 저 가증스러운 가투스를 한 방 먹일 날을 얼마나 기다려 왔는지.


“엘리너 할멈의 혀가 이렇게 날카로운 칼인 줄은 미처 몰랐군. 그런데 왜지?”


주걱턱을 쓸며 가투스는 여유롭게 대꾸했다.


“왜 라무스 유바론의 비밀을 이 자리에서 서슴없이 누설하는 거지?”


“애꿎은 젊은이가 생목숨 잃는 걸 보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이 젊은이가 도련님이 아니라는 확증이 없다면 결국 가투스 공의 손에 죽을 테니 말입니다.”


“그러니까, 생전 처음 보는 낯선 젊은이를 위해 귀하디귀한 도련님의 비밀을 털어놓는다고?”


트집을 잡자는 건지, 의심을 하는 건지 가투스의 낯빛을 보고는 판단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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