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 로스 레갈리스에서

by 화진


“물론이지요. 충분한 시간이 흘렀으니까요.”


또각또각 지팡이 소리를 내며 엘리너는 천천히 자신이 원래 서 있던 자리를 향해 걸었다.


“도련님도 저 약빠르고 지저분한 떠돌이 기사 못지않게 다부진 젊은이가 되셨을 테고, 이 늙은이의 바람이 헛되지 않았다면 스스로를 지킬 줄 아는 사내가 되셨을 겁니다.”


“나쁘지 않은 답이지만 내가 설득되기에는 좀 부족한 것 같은데. 그 이유가 다인가?”


가투스는 피리 부는 자 즉 플라토르에 대해 흥미가 동했다. 그리고 그저 너그러운 노파일 뿐인 줄 알았던 엘리너가 알고 보니 대범하고 달변이라는 것도 꽤 재미있었다.


“그게 다일 리가요. 계속 말씀드리지요. 어차피 도련님은 쫓기는 몸입니다. 무지한 아바루스 왕은…….”


“엘리너! 무례하군.”


페르비아가 눈을 모로 뜨고 꾸짖었다. 엘리너는 테고를 한 번 쳐다보고 나서 페르비아에게 웃는 낯으로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대공의 입장을 난처하게 하고 싶지 않으니 이후로는 조심하겠다는 뜻으로.


솔직히 엘리너는 이제 무서운 것이 없었다. 페르비아든, 가투스든, 왕이든, 죽음이든. 무사히 돌아온 도련님을, 어엿한 청년으로 장성한 도련님을 보았으니 이 자리에서 고꾸라져 죽어도 행복한 최후일 터였다.

“아바루스 왕께서는 전설의 피리를 진짜 피리라고 생각하고는 그걸 도련님이 가지고 도망쳤다고 믿으시잖습니까. 라무스 도련님이 플라토르라는 사실을 왕께서 이제 와 아신다 해도 상황은 달라질 게 없을 겁니다.”


테고가 가볍게 턱을 주억거렸다. 라무스가 플라토르임을 아바루스 왕이 안다면 이전보다 더욱 강하게 열망하리라. 라무스 유바론이 살아 있기를, 산 채로 자신의 앞에 끌려오기를.


지팡이 소리가 멎었다. 엘리너가 가투스를 마주보는 위치까지 온 것이다.


“왕께서는 본인이 직접 확인하고 싶으실 게 틀림없으니까요. 플라토르가 진실인지 피리가 진실인지. 또 도련님이 피리 부는 자가 맞는다면 과연 그 힘으로 어떤 일들이 가능할지.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겠지.”


가투스는 향긋하고 연하게 구워낸 꿩 고기를 한 점 입에 넣었다. 신중하게 찬찬히 음미하고 나서야 삼킨 그가 다시 엘리너에게 말을 건넸다.


“그런데 말이야. 라무스 유바론이 플라토르라면 그에게 신수를 부르는 능력이라도 있다는 건가? 전해 오는 신화적인 이야기들이 있잖아. 바다로 침략해 온 라파키타스가 마가룸을 앞세워 플람마의 비를 내렸을 때 해치와 불새 들이 나타나 그들을 물리쳤다는. 그때 피리 소리가 났다고 말이야.”


비아냥거리는 말투는 아니었다.


“플라토르가 무얼 할 수 있는지야 이 늙은이도 알 길은 없습니다. 다만, 지금 이 시대에 나타났다는 것만은 여신의 뜻이 아니겠습니까? 플라토르를 필요로 하는 때가 있겠지요.”


말을 마친 엘리너는 입을 꾹 다물고 눈을 감아 버렸다. 지팡이만 힘 있게 짚은 채. 그때 대공비 카스티타가 한 손을 이마에 대고 눈을 찌푸렸다. 그러자 테고 대공이 그녀를 부축해 식당을 나갔다. 공식적으로 저녁 자리가 파한 것이었다. 엘리너가 그들을 따랐다.


가투스와 페르비아는 신경 쓰지 않고 식사를 계속했다. 라무스는 부녀의 눈치를 살피며 슬금슬금 일어났다. 페르비아가 가도 좋다는 턱짓을 했다.


비는 그쳐 있었다. 라무스는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해서 뱃속이 허전했지만 기분은 상쾌했다. 엘리너가 자신을 알아보았고, 대단히 훌륭한 대응과 말솜씨를 보여 주었기 때문이었다.


이후로 카푸로 출발할 때까지 가투스는 라무스를 그냥 내버려두었다. 라무스가 페르비아와 함께 카푸에 도착했을 때는 여름의 기세가 한풀 꺾일 무렵이었다.


카푸는 무척 번화한 도시였고 왕궁인 로스 레갈리스는 눈이 부시도록 화려했다. 아바루스 왕이 재물과 인력을 쏟아 부어 재정비한 결과였다.


페르비아는 라무스를 자신의 호위 기사 무리에 합류시켰다. 라무스는 거칠게 기른 수염과 머리를 깎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페르비아의 요구를 수락했다. 이슬방울의 형상 안에 월계관을 든 손과 검을 든 손이 교차하는 문장을 볼 때마다 라무스는 어색함을 느꼈다.


결혼에 대해 아바루스 왕과 담판을 지으러 갔던 페르비아가 돌아와 라무스를 찾았다. 라무스는 그녀의 얼굴을 보자마자 그녀가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음을 알 수 있었다.


“내일 늦은 오후로 결정났어. 투리스의 흰 벽이 장밋빛으로 변할 때.”


투리스는 로스 레갈리스에서 가장 높은 탑이었다. 하얀 돌로 된 탑은 서산에 해가 질 때면 노을빛에 곱게 물들곤 했다.


“와고르, 제대로 해야 해. 안 그럼 내 손에 죽을 테니까.”


정색을 한 페르비아가 싸늘하게 못박았다.


“와고르가 이길 겁니다. 레이디 페르비아.”


옆에서 시중을 들던 디위나 할멈이 페르비아를 안심시키면서 라무스에게 온기 어린 눈길을 보냈다.


“투리스의 장밋빛이 가시기 전에 끝내지요.”


라무스가 단언했다.


“참, 한 가지 와고르가 명심해야 할 게 있어. 아바루스 전하께서 규칙을 바꾸셨어. 반드시 한쪽이 죽어야 승패가 결정되는 결투로. 원래 결혼 문제로 일어나는 결투에서는 가급적이면 서로 죽이지 않고 승부를 보는 게 티토니아 전역을 아우르는 묵약이잖아. 근데 아마 내가 괘씸해서 저러시는 걸 거야. 하지만 뭐, 상관없지? 와고르?”


“당연히.”


조금 이상했지만 라무스는 별 것 아니라는 투로 대답했다.


“디위나. 내가 알아보라던 건, 알아봤어?”


“예. 저쪽에서도 따로 결투 기사를 내세운답니다.”


“그럴 줄 알았어. 그럼, 결투 기사는 어디의 누구래?”


“아바루스 전하께서 전하의 친위대에서 고른 자를 내어주셨다고 합니다.”


달갑지 않다는 듯 디위나의 미간에 세로줄이 잡혔다.


“그래서, 어느 가문의 누구인지는 알아내지 못했다는 말이지?”


흐흥, 하고 코웃음을 친 페르비아가 다시 물었다.


“예. 입단속이 철통과 같은지라……. 어쨌든 내일 정오까지는 최대한 더 염탐해보겠습니다.”


“아니야, 됐어. 디위나 할멈이 예언했잖아. 와고르가 이기게 되어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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