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 아바루스 왕을 알현하다

by 화진


페르비아가 딱 잘라 말하자 디위나는 말문을 닫고 공순하게 고개를 숙였다. 페르비아는 라무스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와고르. 더 궁금한 건 없어?”


둘 사이의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빤히 올려다보는 페르비아의 숨결이 라무스의 턱에 느껴질 정도로.


“없습니다.”


라무스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는 머리를 긁적였다. 페르비아는 충분히 예뻤고 무척 달콤한 향기를 뿜었지만 라무스에게는 부담스러울 뿐이었다. 그가 본 그녀는 잔인성과 탐욕 그 자체였다. 심지어 그녀는 그런 자신의 본성을 숨기려고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과시했으면 했지.


페르비아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샐쭉하더니 그를 향해 손가락을 까닥였다. 가까이 오라니까.


“거기서 말씀하시죠. 이놈은 너무 달콤한 냄새를 맡으면 재채기가 나오거든요.”


당장이라도 재채기를 할 것처럼 코를 비비며 라무스가 핑계를 댔다.


“아닐 텐데?”


라무스에게 달려들면서 페르비아가 다. 그녀는 라무스의 옷깃을 꽉 틀어쥐더니 그의 가슴팍에 귀를 갖다 댔다. 왼쪽, 심장이 있을 정도의 높이에.


“엣-취!”


요란한 재채기 소리가 났다. 라무스가 진짜로 재채기를 한 것이었다. 다행히 그가 고개를 옆으로 돌리는 정도의 예절은 지켰기에 페르비아에게 침이 튀지는 않았다. 라무스가 다시금 코를 문지르자 페르비아가 황급히 그를 떠밀고 옆으로 비켜났다.


“뭐야? 달콤한 향을 맡으면 재채기 하는 거 정말이었어?”


“엣취! 방금 왜 그러신 겁니까?”


“그냥. 아닌 것도 알고. 내가 그런 걸 듣는 특별한 능력이 없는 것도 알지만. 그냥.”


피리 부는 자에 대한 이야기였다.


“보기와 달리 허황된 데가 있군요.”


황당하고 한심하다는 투로 라무스가 이죽거렸다. 페르비아는 기분 나빠하지도 않고 비뚜름한 미소로 응수했다.


“됐고. 행운을 빌어 주지. 널 위해서가 아니라 네 승리로 당당하게 이리투스 글라키에사를 차 버릴 나를 위해 말이야. 잊지 마. 네가 살 길은 상대를 죽이는 길밖에 없다는 걸. 그럼 내일 결투장에서 보자고.”


단호하게 마지막 말을 남긴 페르비아가 방을 나갔다. 따라나가던 디위나 할멈이 뒤를 힐끔 돌아보았다. 그 행동의 의미를 라무스가 알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늦은 밤에 디위나가 혼자서 다시 라무스를 찾아왔다.


*


이그노스 대비로부터 시스가 최초 신전에 와 있으며 결혼을 무효화하고 싶어 한다는 말을 전해들은 아바루스는 지체 없이 시스를 로스 레갈리스의 알현실로 불러들였다.


“오, 나이아시스. 어떻게 그런 꼴로……?”


높은 단에 놓인 왕좌 옆 왕비용 의자에 앉은 티티아 왕비가 흉한 것을 봤다는 듯 고운 손을 들어 눈을 가리는 시늉을 했다. 시스가 짧게 자르고 탁하게 물들인 머리를 하고 있음이 그녀의 눈에 거슬린다는 것이었다.


“가발이든 풍성한 장식이든, 가리려고 들면 가릴 수가 있는 거잖니? 그런 걸 가지고 사람들은 마음가짐의 문제, 라고들…….”


요컨대 시스에게 예의범절 혹은 왕과 왕비에 대한 존경심이 부족하다는 지적이었다. 아바루스가 한 손을 들어 티티아의 말을 멈추게 했다.


“그만하시오, 왕비. 머리 모양 따위야 사소한 일이고, 지금 저 아이가 신성한 결혼의 서약을 깨겠다고 나선 것이야말로 우리가 실로 경악할 일이 아닌가 말이오.”


“전하께서는 저 아이에게 너무 너그러우십니다.”


티티아의 불평에 시스는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나에게 너그럽다고? 너그러워서 나를 진열된 상품처럼 취급했나? 구혼자들에게 나도 모르게 내 모습을 훔쳐보게 하고 그 대가로 이 가문 저 가문에서 재물을 뜯어내셨나? 그러다 결국 가장 높은 값을 치른 프레케스 가에 팔아 드셨지. 내 생각, 내 감정 같은 건 안중에도 없이.


“나이아시스. 대비께 들었다. 프레케스 공작과 이혼하겠다고?”


“전하. 이혼이 아니라 결혼의 무효화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왕좌 앞 계단 아래에 시스와 나란히 서 있던 이그노스 대비가 정정하고 나섰다.


“아, 그러셨던가요? 어머니께선 이만 거기 좀 앉으시지요.”


아바루스가 측면에 놓인 의자를 가리켰다. 이그노스는 그리고 가 앉았다.


“나이아시스. 내가 내린 결혼을 무효로 돌리겠다고? 합당한 근거가 있느냐?”


공들여 기른 수염을 쓰다듬으며 아바루스가 가늘게 뜬 눈으로 시스를 내려다보았다. 적당한 길이로 가꾼 밝은 밤색 수염이 뾰족 턱을 훌륭하게 가려 주고 있었다. 티티아 왕비의 조언 덕분이었다.


“있습니다. 타키툼의 신전에서 저와 함께 여신의 발아래에 섰던 자는 데세르티온 프레케스 공작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사내였단 말씀입니다.”


시스가 담담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설명했다.


“그게 정말이냐?”


아바루스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티티아도 놀란 기색이었다.


“맹세코 사실입니다.”


“네 말이 사실이라는 건 어떻게 증명할 것이냐?”


“타키툼 신전의 클레멘스 사제가 그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공모자였지. 시스는 왠지 모르게 씁쓸했다.


“타키툼의 사제가? 그렇다면 확인을 위해서는 클라비스 대사제의 도움이 필요하겠구나.”


“저 아이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아요. 그것도 사제까지 걸고넘어지면서 말이에요.”


티티아가 시스의 말에 힘을 실어 주었다. 시스를 미끼로 부유한 가문들의 재물을 알겨내자는 것이 애초에 티티아의 머리에서 나온 얕은수였다. 티티아는 다시 한 번 시스를 내세워 장사를 할 수 있겠다 싶어서 낯빛이 환해졌다.


“그건 맞는 말이오, 왕비.”


프레케스 가의 기망이 확실하다면 결혼의 무효를 선언하여 시스를 다시 군침 도는 신붓감으로 만드는 것이 아바루스에게도 이득이었다.


무표정하게 선 시스는 속으로 웃었다. 솔깃하시죠? 하지만 죄송하게도 이번에는 순순히 팔려가지 않을 예정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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