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의 무효라…….”
가늘고 고운 손가락으로 다이아몬드 귀걸이를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리던 티티아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계단을 내려갔다.
온몸에 휘감은 보석이 티티아의 움직임을 따라 반짝반짝 제각각의 빛과 가치를 발했다. 귀와 목의 다이아몬드는 투명하게, 허리에 단 루비 브로치는 붉게, 소매에 달린 문스톤 단추는 달빛처럼, 스커트 자락의 진주와 은구슬은 연연하고 청아하게.
한들한들 다가오는 빛무리 같은 티티아를 보는 시스는 눈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전보다 더 호사로워진 치장이었다.
“나이아시스. 조금 난처할 수도 있는 질문이겠지만, 묻지 않고 넘어갈 수는 없단다.”
시스의 귀에 입술을 가까이 하고 티티아가 속삭였다.
“그래서, 초야는?”
“저와 프레케스 공작 사이에는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무덤덤하게 그러나 작지 않은 목소리로 시스가 말했다. 티티아는 잘했다는 듯 그리고 잘됐다는 듯 환한 미소를 머금은 채 시스의 어깨를 다정히 두드리고는 자신의 자리로 되돌아갔다.
아바루스 왕과 티티아가 시스와 이그노스에게는 들리지 않는 밀담을 몇 마디 주고받았다. 이윽고 아바루스 왕이 시스를 불렀다.
“나이아시스 글라키에사. 너의 결혼 절차에 중대한 흠결이 있었고, 너와 데세르티온 프레케스 공작이 실질적인 부부도 아니었다고 하니, 그 결혼을 무효로 해달라는 네 청원을 수락하겠다. 다만.”
이그노스와 시스가 눈을 마주쳤다. 다만?
“그 무효를 확정하기 전에 타키툼 쪽에 확인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너는 쿠라토 공작의 양녀이기 이전에 우리 라크리모 왕가의 미세르코르디아 공주가 남긴 아이이니 앞으로 로스 레갈리스에서 지내거라. 이전 결혼의 무효를 확정하고 나면 나와 티티아가 새 결혼 상대를 물색해 줄 테니. 알겠느냐?”
선심이라도 쓰는 듯한 아바루스의 표정과 말투가 시스는 몹시 거슬렸다. 그러나 내색해서 이로울 것이 없다는 걸 알기에 낯빛을 부드럽게 하고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듯 대답하기를 머뭇거렸다. 그 모습을 본 이그노스가 대신 나섰다.
“전하의 말씀이 구구절절 옳습니다만. 시스는 로스 레갈리스에 머물 수가 없습니다.”
“예? 무슨 말씀입니까, 어머니?”
“현재 시스는 최초 신전의 보호 아래에 있습니다. 시스를 여기에 데리고 올 때 대사제님께 약속을 드렸습니다. 전하를 알현하고 나면 시스를 다시 최초 신전으로 데려다 주겠다고.”
티티아 왕비가 가녀린 목을 우아하게 기울이고 이그노스 대비를 내려다보았다.
“보호라면 로스 레갈리스보다 더 적격인 장소가 없을 텐데요. 또 여기는 나이아시스에게는 집이나 매한가지입니다. 아무리 대사제라 해도 왕의 가정사에 개입할 수는 없어요.”
그녀의 말이 옳다는 뜻으로 아바루스가 왕관 쓴 머리를 크고 느리게 한 번 끄덕였다. 고심하던 이그노스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왕께서는 최초 신전의 신성 심판권을 침해하실 수 없으시지요. 이리 된 이상 말씀드리지 않을 수가 없군요. 실은 현재 시스는 최초 신전의 신성 심판 관련 주요 증인입니다.”
“신성 심판 사건의 증인이라니…….”
아바루스와 티티아가 다시 머리를 맞댔다. 소곤소곤 뭔가를 의논한 끝에 아바루스가 다시 시선을 시스에게로 옮겼다.
“지금 여기에 포르미두사의 네 친척인 이리투스가 와 있단다. 며칠 뒤에 이리투스와 관련한 아주 중요한 행사가 있을 예정인데, 거기에는 참석할 수 있겠지? 모르긴 몰라도, 자비로운 클라비스 대사제라면 네가 답답하게 신전에만 갇혀 있기를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참석하겠습니다.”
이리투스. 시스가 포르미두사의 어머니 장례식에서 딱 한 번 만났던 친척이었다. 그래도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았던 건 대놓고 시스를 남 취급하던 다른 친척들과는 달랐던 이리투스의 태도 때문이었다. 시스가 기억하는 이리투스는 착하고 따뜻한 심성의 소유자였다.
로스 레갈리스를 나와 최초 신전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시스는 이그노스에게 들었다. 이리투스가 페르비아와 약혼했다는 것을. 페르비아가 약혼을 건 결투를 청구했고 아바루스 왕이 허락했다는 것을. 왕이 말한 행사라는 것이 다름 아닌 결투라는 것을.
“그럼 레이디 페르비아의 결투 기사가 이기면 약혼이 파기되고, 이리투스가 이기면 예정대로 결혼하게 되는 거네요?”
“그렇지. 그런데 이리투스도 결투 기사를 따로 내세웠다더구나. 이리투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진 왕이 직접 결투 기사를 구해줬다고 들었다.”
시스는 생각에 잠겼다. 페르비아가 이리투스를 싫어하는 건 알겠고. 이리투스는 어떤 마음일까? 페르비아가 좋아서 약혼을 깨기 싫은 걸까? 아니면 단순히 왕을 거역하지 못하는 걸까? 어느 쪽이든 이리투스가 딱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며칠이라는 시간은 훌쩍 지나갔다. 시스는 그 동안 전혀 지루하거나 답답하지 않게 잘 지냈다. 솔리타 즉 미세르 공주를 졸졸 따라다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웠다. 솔리타가 돌보는 양들은 순하고 귀여웠다. 농경지는 넓고 다채로웠으며 주변의 숲도 탐험하고 놀기에 좋았다.
결투가 벌어지는 날 티티아 왕비가 시스에게 시녀를 셋이나 보냈다. 시스를 탐나는 상품으로 꾸미기 위한 목적이었다. 시스는 어쩔 수 없이 그녀들에게 둘러싸여 머리에 가발을 쓰고 요란한 장식을 얹고, 왕비가 보낸 화려한 의상을 갖춰 입었다.
흰 탑 투리스 아래의 공터에는 원형의 임시 객석이 설치되어 있었다. 객석은 높게 마련되어 결투자들을 내려다보는 구조였다. 관객은 그리 많은 편은 아니었다. 페르베아투의 왕과 왕비 그리고 대귀족들과 그들의 가족이 모인 자리였다.
시스는 티티아 왕비가 시킨 대로 얇은 비단 천으로 눈 아래의 얼굴을 가렸다. 그런 식으로 호기심을 증폭시켜 상품의 가치를 높이려는 왕비의 속셈을 모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시스로서는 처음부터 곁눈질과 수군거림의 대상이 되는 것보다는 낫겠다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