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티아 왕비가 배정해 놓은 시스의 자리는 라크리모 왕가 쪽이 아닌 사피루스 포소리움 백작 가의 가족석이었다. 사피루스 백작과 그의 부인 소브리에는 나이가 많고 소박한 사람들이었고, 그들의 아들들은 모두 가업인 보석 광산을 운영하느라 멀리 나가 있었다.
“어서 와요. 이토록 귀하신 레이디와 잠시나마 가족으로 함께 앉게 되어서 우린 정말이지 기쁘다오.”
소브리에가 다정한 얼굴로 마중을 나와 시스를 소중하게 자신들의 자리로 인도했다.
“자, 이리 앉으시오. 우리에게 딸이나 젊은 여성 친척이 없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으니 벌써부터 다들 누구인지 궁금해 죽겠다는 눈으로 쳐다보는군.”
사피루스 백작도 시스를 즐겁게 맞이했다.
“왕비께서 두 분에게는 제가 누구인지 말씀하셨나요?”
레이스 장갑을 낀 손으로 입을 가린 시스가 소브리에를 보며 작게 물었다. 사피루스 백작은 한쪽 눈을 찡긋했고 소브리에는 ‘예’라고 대답하며 웃음을 지었다.
“그럼 우린 오늘 비밀스러운 역할극의 동료인 셈이네요. 잘 부탁드려요.”
시스도 눈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이런 식의 역할극이라면 적잖은 경험이 있었다. 레이디 앙켑세라와 함께 많이 해봤던 일이다.
사피루스와 소브리에는 말이 많은 노인들이 아니었다. 시스는 금세 편안한 기분이 되어 찬찬히 주위를 둘러볼 수 있었다. 그녀가 찾던 이리투스는 아바루스 왕의 옆에 있었다. 어릴 때 이후로 만나지 못했지만 글라키에사 가문의 칡부엉이 문장이 들어간 옷으로 알아보았다.
이리투스는 멍하니 결투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거북하고 불편해 하는 것 같았다. 다음으로 시스의 시선이 향한 곳은 티티아 왕비의 옆자리였다. 페르비아가 티티아 왕비에 버금가게 찬란한 차림새로 앉아 있었다. 그녀는 이리투스와 달리 여유가 넘치고 자신만만했다.
페르비아와 시스의 눈이 마주쳤다. 시스는 살짝 고개 인사를 했다. 페르비아가 시스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티티아 왕비와 몇 마디 주고받더니 의미심장하게 방긋 웃으며 턱을 조금 내려 답인사했다.
어느덧 객석이 거의 들어찼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을 뚫고 리라 선율이 흘러나왔다. 아바루스 왕의 자리 아래에 앉은 음유 시인이 연주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입을 다물고 귀를 기울이자 음유 시인이 ‘어리석은 사랑의 노래’로 알려진 시를 읊었다.
감미로운 키스를 하는 입술과
거짓을 말하는 입술이 하나일지니
황홀한 순간의 맹세란
아침 이슬보다 연약한 것
돌아선 연인의 등이란
성엣장보다 차가운 것
사랑은 아름답고 짧은 한바탕 봄꿈
꿈에서 깨어나니
폐허가 된 낙원과
제물이 된 친구들
사랑을 믿었던 어리석은 이, 모든 걸 잃었네
오래 잠들었던 슬프고 아름다운 존재가
지상에 남겨둔 맹세를 거두러 돌아오는 날
새벽과 밤이 부딪치고
불과 물이 뒤섞이리라
뒤의 네 구절은 시스가 알지 못하던 것이었는데 어쩐지 마음에 걸리는 데가 있었다. 저 부분만 즉흥적으로 지어 덧붙인 것인지, 본디 완전한 하나였는데 소실되었던 것인지. 만약 후자라면 저 음유 시인이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시스는 의문스러웠다.
사람들은 다들 음유 시인이 즉흥시를 잇댄 거라고 여기는 듯했다. 그럴듯한 전개를 칭찬하는 말들이 여기저기에서 나왔다.
“저 음유 시인은 누군가요? 왕궁 소속인가요?”
시스가 묻자 사피루스 백작이 머리를 가로흔들었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요.”
리라 소리가 멎고 왕궁의 시종장 루크룸이 큰 소리로 결투의 요지를 설명했다. 그러고는 결투에 나선 두 사람을 호명했다.
“이리투스 글라키에사 경의 결투 기사, 코르푸스!”
북서쪽 장막 너머에서 코르푸스라는 자가 나왔다. 온몸과 얼굴을 잿빛의 옷과 천으로 감싸 가리고 있었다.
“레이디 페르비아 라크리모의 결투 기사, 와고르!”
동남쪽 장막을 젖히고 온통 푸른색으로 휘감은 와고르가 모습을 드러냈다.
코르푸스도 와고르도 갑옷이나 투구를 착용하지 않고 장검과 방패만 들었다. 아바루스 왕이 정한 규칙이었다. 보다 쉽게 죽일 수 있도록.
마침내 서쪽 하늘이 타는 듯 붉게 물들고 투리스가 장및빛으로 변했다. 긴 뿔나팔 소리가 결투의 시작을 알렸다.
코르푸스와 와고르는 선뜻 거리를 좁히지 않은 채 좌우로 움직이며 서로를 탐색했다.
그들을 유심히 지켜보던 시스가 눈을 부릅뜨더니 문득 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았다. 자칫하면 입 밖으로 ‘와고르가 라무스?’라는 말을 흘릴 뻔했다. 얼굴을 거의 가려서 금방 알아보진 못했지만 시스는 그가 라무스임을 확신했다.
와고르가 라무스라는 사실을 알아채자 시스는 급격히 초조해졌다. 이겨야 하는데. 이길 거야. 그런데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어째서 당신이 페르비아의 결투 기사인 거냐고.
예상보다 탐색전이 길어지자 객석에 다그치는 외침이 튀어나왔다.
“공격해. 공격하라고!”
“검을 휘둘러! 죽여 버려!”
선제공격은 라무스가 했다. 그의 검이 아슬아슬하게 코르푸스의 목을 비껴갔다. 빠르고 침착하게 몸을 피한 코르푸스가 라무스에게 똑같은 공격을 돌려주었다. 라무스도 코르푸스와 비슷한 동작으로 검을 피했다.
라무스는 어젯밤 자신을 찾아왔던 디위나 할멈이 경고해준 말을 머릿속으로 곱씹으면서 방패를 앞으로 들었다. 코르푸스의 검이 빗발치듯 찔러 들어왔다. 한참 동안 방패로 막고 발을 놀려 피하자 코르푸스가 숨을 고르며 잠시 물러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