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흠. 모르고 하는 소리인지, 알고도 일부러 해보는 소리인지…….”
가투스가 다시금 탐색의 눈길을 던지자 라무스는 얼른 의뭉스럽게 두 눈을 끔벅댔다.
“하여튼 테고를 제거하는 일은 기회의 문제는 아니었다. 정세와 충성심과 지배의 문제지.”
라무스는 확실히 깨달았다. 가투스의 제안에 함정이 숨어 있음을.
“그러니까 말씀인즉 다른 나라와 영주들이 보기에 정당성이 있어야 하고, 시데레온 사람들의 충성심이 페르베아투에 대한 항쟁으로 격화되지 않도록 그들을 납득시킬 만한 정황이어야 하고, 이후로 시데레온은 페르베아투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겠지만 표면적으로는 변화가 없는 듯 보여야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영리하군. 그래, 그거야. 내 의도를 꿰뚫어 본 같으니 말해 봐라. 내가 왜 하필 너에게 제안한 것인지.”
그건 바로 함정과 의심이었다. 라무스는 이 두 겹의 위험을 정면으로 돌파할 작정이었으므로 적당한 낯빛을 지어 보였다. 약간의 기고만장과 적당한 정도의 비열함이 섞인 표정을.
“제 얼굴이 마음에 드셔서겠죠. 오래 전에 사라진 아세르 대공의 아들 라무스를 대신할 가짜로 내세우기에 적합하다 싶으셨던 겁니다. 아닙니까?”
속에 뭐가 들었는지 점점 더 모를 놈이라고 생각하면서 가투스는 한층 가까워진 대장간에 시선을 두었다. 불그레한 불빛이 새어 나와 주변을 아른아른 밝히고 있었다.
“왜 아니겠느냐. 맞다.”
“저를 의심하고 계십니까? 제가 라무스 유바론일 것 같습니까?”
“그럴지도 모르지. 아닐지도 모르고. 그건 그렇고. 내 제안을 받아들이겠느냐?”
라무스는 짐짓 건방진 웃음소리를 냈다. 가투스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이런 내용이 되겠군요. 라무스 유바론이 나타나 삼촌인 테고 공을 페르베아투에 협력한 배신자로 규정하고 죽인다. 라무스는 마땅히 자신의 몫이었던 대공의 위에 오른다. 그렇게 되면 주변국들이나 영주들이나 시데레온 사람들 가운데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죠.”
가투스도 작위적으로 웃었다.
“그런 것이지. 세상 사람들은 정의의 서사라고 하면 기꺼이 설득될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
“표면적인 정의의 서사죠. 내막은 계략이니까요.”
두 사람의 대화가 중단된 것은 대장간에서 일하던 이들이 나온 탓이었다.
“자문관이신 가투스 공께 인사 올립니다.”
우두머리 대장장이 잉쿠스를 포함한 네 사람이 허리를 굽혔다.
“수고들 많네. 여기 내 일행은 페르비아의 손님인데, 비록 떠돌이 기사라고는 하지만 내 보기에 괜찮은 젊은이 같아서 우리 폴루스 니두스의 대장간에서 만든 단검을 하나 선물할까 해서 데려왔다네.”
잉쿠스가 라무스를 보았다. 라무스는 가급적이면 자신이 그에게 방탕하고 야심에 찬 낯선 자로 보이기를 바라며 대충 고개를 숙였다. 잉쿠스는 변한 게 없어 보였다. 예나 지금이나 강인하고 탄탄한 늙은 대장장이였다. 머리카락을 완전히 밀고 두건을 두른 것도 그대로였다.
마뜩잖은 눈빛을 라무스에게서 거둔 잉쿠스가 옆으로 비켜섰다.
“들어가지.”
가투스가 발을 뗐다. 라무스는 잉쿠스가 자신을 보고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것에 안도하는 한편 당연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잉쿠스가 기억하는 도련님은 웃음과 장난기가 많은 귀여운 꼬마인 것이다. 거칠고 차가운 눈빛의 지저분한 청년에게서 그 옛날의 사랑스러운 소년을 떠올리기란 누구라도 쉽지 않으리라.
대장간 안쪽 방으로 들어가자 잉쿠스가 상자를 열어 몇 개의 단검을 꺼내 탁자 위에 죽 늘어놓았다.
“자, 골라 봐라.”
가장 좋은 것이 어떤 것인지 라무스는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시데레온 북쪽의 페라리우에서 나는 강철로 만든 칼립스 단검은 날붙이의 색이 미묘하게 탁해 보이고 형태도 단순한 편이다. 그래서 페라리우 산 강철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그 가치를 못 알아보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것으로 하겠습니다.”
라무스는 의도적으로 칼립스 단검이 아닌 다른 것을 골랐다. 손잡이에 오렌지 색의 선스톤 장식이 들어간 것이었다.
“최고의 선택은 아니지만 두고두고 회자되기에 나쁘지 않은 선택인 것 같군.”
가투스의 뜻 모를 말을 귓등으로 흘리며 잉쿠스는 재빨리 나머지 단검들을 챙겨 상자에 넣어 버렸다. 그의 눈이 라무스의 손에 머문 것은 아주 잠깐이었다. 정확하게는 때 탄 천으로 감은 손등에. 그러나 잉쿠스는 이내 무관심하게 고개를 돌렸다.
대장간을 나온 라무스는 계속 걸었다.
“두고두고 회자될 단검이라……. 이 단검을 쓰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럴듯하잖나. 배신자를 처단하는 용도로 쓰기에.”
“공의 제안을 거절하면 이 단검도 돌려드려야 하는 겁니까?”
“그럴 것까지는 없다만.”
멈춰 선 가투스가 라무스를 향해 돌아섰다.
“왜 거절하려는 거지?”
그의 눈초리에서 미심쩍어하는 빛이 느껴졌다.
“가투스 공의 희생양이 되기는 싫으니까요.”
그림자처럼 뒤를 따르는 거구의 호위 기사를 의식하며 몸을 잔뜩 도사린 라무스가 억울한 미소를 띠었다.
“무슨 엉뚱한 소리지?”
가투스는 일단 모르쇠를 잡아 보았다.
“이 단검으로 테고 공을 처리하고 라무스 유바론인 척 행세해 본들 며칠도 못 가서 공께 뒤통수를 맞고 사형에 처해질 텐데, 그걸 뻔히 알면서도 제안을 받아들일 수는 없잖습니까? 아마 공께서는 공표하시겠지요. 테고 공을 죽인 저 자는 진짜 라무스 유바론이 아닌 가짜다, 하고 말입니다. 제가 가짜인 증거와 증인은 차고 넘칠 테지요. 저는 가짜가 맞으니까요.”
만약 라무스가 정말로 테고를 죽인다면 가투스에게는 라무스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하등 중요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어차피 종국에는 가짜로 몰아서 사형에 처해 버릴 계획이었으므로.
잠자코 듣던 가투스가 팔짱을 끼더니 라무스를 향해 빙긋이 웃었다.
“와고르. 보기보다 더 약아빠졌구나. 나는 널 이용해서 테고를 제거하지 못했지만 페르비아는 목적을 이루겠군.”
“제안을 들었던 일 자체를 제 머릿속에서 깨끗이 지우겠습니다.”
호위 기사를 슬쩍 돌아본 라무스가 두렵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