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 음유 시인 살릭툼

by 화진


아키피오는 장담했던 대로 티티아 왕비의 허락을 받아서 왔다. 잠시 시스와 조용하게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싶다고 아키피오가 청하자 티티아는 하르몬의 금과 보석이 발하는 황홀한 광채를 상상하며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왕비의 시녀장 파렌티아가 시스와 아키피오를 안내했다. 티티아 왕비가 앉은 자리 뒤로 두 개의 커튼을 지나자 창문에 면한 아담한 공간이 나왔다.


“이제 왕비께서는 네가 나에게 관심 있는 줄로 아실 텐데.”



“관심이야 원래부터 많았지. 삼 년 전에 오티움의 케라수스 축제에서 봤을 때부터.”


오티움에서는 케라수스 꽃이 피면 축제를 열고 하루 동안 교정을 개방했다. 아키피오는 형인 인티무스를 만나러 텔룸에 갔다가 운 좋게 케라수스 축제날을 맞았고, 오티움의 봄의 절정을 생생하게 맛볼 수 있었다.


그날 시스는 작은 노천 무대에서 인티무스를 비롯한 교우들과 연극을 상연했다. 남자 역은 여자가, 여자 역은 남자가 맡고 악기 소리가 대사를 대신했다. 우스꽝스러운 도둑과 레이디와 하녀와 기사가 등장하는 극이었다. 이따금씩 무대 위로 케라수스 꽃잎이 비처럼 내렸다.


도둑 역을 맡은 시스의 능청스럽고 자연스러운 연기에 배꼽을 잡았던 기억이 떠올라 아키피오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하여튼 왕비 전하 때문에 너 내일부터 좀 괴로워질 걸? 왕비께서 너에게 나와 결혼할 마음이 있는지, 그럴 마음이 있다면 나를 위해 어느 정도의 금화를 내놓을 수 있는지, 은근하고 끈덕지게 찔러보실 테니 말이야.”


긴 의자에 걸터앉아 창밖의 화원을 내려다보면서 시스가 지겹다는 듯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둘이 따로 얘기해 보니 실망스럽더라고 말하지 뭐. 내가 원하는 여자와는 거리가 멀다고.”


아키피오는 창문 옆 벽에 한쪽 어깨를 기대고 서서 시스와 같은 방향으로 시선을 두었다.


“왕비께서 실망하시겠네. 곧바로 나를 팔아넘길 다른 귀족을 찾아내시겠지만.”


“팔아넘기다니?”


“말 그대로야.”


“그럼 무효가 된 그 결혼도?”


시스는 대답 대신 어깨를 들었다 내렸다.


“너무하네.”


창문 옆 탁자에 와인 병과 잔이 놓여 있었다. 아키피오는 시스에게 한 잔을 따라서 건네고 자신도 마셨다.

“아까 결투장에서 노래했던 그 음유 시인 말이야. 파티에는 부르지 않았던데, 지금 어디에 있을까?”


와인을 마시지 않고 내려놓은 시스가 화제를 돌렸다.


“음유 시인? 그 사람은 왜?”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그래? 잠깐 있어 봐.”


아키피오가 커튼을 젖히고 나갔다. 그는 시스의 짐작대로 이내 다시 돌아왔다.


“왕비께 부탁드렸어. 찾아서 여기로 보내주시겠대.”


“왕비께서는 우리가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여기시겠구나. 하르몬의 발룩스 하천의 금빛 물결이 그녀의 눈동자에서 넘실대겠네.”


발룩스 하천은 융투라 강의 지류로 사금이 많이 났다. 티티아 왕비의 눈에 아키피오의 행동들은 시스에 대한 호감과 정성으로 보일 테니 그녀가 막대한 신붓값에 대한 기대에 부푸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러면 만약에 내가 혹은 다른 어떤 누군가가 왕비께 너와 결혼하겠다고 하면 네 뜻과는 상관없이 일이 그렇게 된다는 거야? 신붓값을 톡톡히 낸다는 전제 하에?”


“맞아. 그런 상황이야.”


“그럼 혹시 나와 약혼할래? 일단 약혼을 하면 왕비의 손에 놀아날 필요 없잖아. 나중에 파혼해줄게.”


심각한 기색이라고는 없이 아키피오가 말했다. 농담도 정도껏 하라는 표정으로 시스가 주먹으로 아키피오의 팔을 가볍게 쳤다.


“고맙지만 사양할게. 걱정 마. 이번에는 왕비 뜻대로 되지 않을 테니까.”


두 사람의 대화는 텔룸에서의 추억담으로 넘어갔다. 유쾌한 기억으로 한참 이야기꽃을 피우는데 커텐 저 바깥에서 파렌티아의 헛기침 소리가 넘어왔다. 이어 띠리링 류트 현을 튕기는 소리가 나고 음유 시인이 들어왔다.


“소인, 살릭툼이라고 합니다. 듣고 싶으신 시나 노래가 따로 있으십니까?”


공손한 몸짓으로 허리 숙여 절하고 나서 음유 시인이 물었다. 머리카락은 물을 들였는지 어두운 청록색이고, 피부색은 살구처럼 곱고, 몸피가 날씬한 미청년이었다. 키는 사내치고 작은 편이었다.


“살릭툼. 아까 불렀던 그 노래를 불러줘.”


의자에서 일어난 시스가 요구했다.


“아아, 그. 어리석은 사랑의 노래 말씀이군요.”


“바로 그거. 처음부터 말고, 오래 잠들었던, 거기부터.”


살릭툼은 시스와 비슷한 색의 눈동자를 또르륵 굴리며 미묘한 눈웃음을 짓더니 류트를 연주하며 노래했다.


오래 잠들었던 슬프고 아름다운 존재가

지상에 남겨둔 맹세를 거두러 돌아오는 날

새벽과 밤이 부딪치고

불과 물이 뒤섞이리라


그의 노래가 끝나자 시스가 물었다.


“어리석은 사랑의 노래에 이런 내용이 이어지는지 몰랐어. 말해 봐, 살릭툼. 직접 지어서 붙인 거야, 아니면 원래 그런 노래인 거야?”


“제가 지어서 붙였지만, 원래 그런 노래입니다.”


살릭툼이 이상한 대답을 했다.


“무슨 소리지? 지어서 붙였지만, 원래 그런 노래라니. 어떻게 그럴 수……? 그럴 수도 있긴 있겠구나.”


뭔가 짚이는 것이 있는 사람처럼 시스가 중얼거렸다.


“만약 살릭툼이 이 노래를 처음 부른 자라면, 그러니까 지어서 불렀던 자라면 가능해.”


“시스. 어리석은 사랑의 노래는 먼 옛날부터 전해오는 노래야. 어떻게 이런 젊은 음유 시인이 지었을 수가 있겠어?”


말도 안 된다는 투로 말하는 아키피오에게 시스가 가만히 있어 달라는 듯 손을 들어 보였다.


“살릭툼. 누구야 넌? 어디에서 온 누구냐고.”


진지하고 간절하게 시스가 물었다. 살릭툼의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