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 그 숲의 반 정령

by 화진


시스와 아키피오의 놀란 시선이 순간적으로 마주쳤다가 곧바로 살릭툼에게로 돌아갔다.


그의 곧았던 등은 비스듬히 굽어지고 매끈했던 피부는 쪼그라들었다. 머리카락은 길어지면서 새하얗게 세었다. 잠깐 사이에 젊은 음유 시인은 간 데 없고 고비늙은 노파가 지팡이를 짚고 서 있었다. 갓 꺾은 것 같은 생나무 지팡이에 잔가지와 버들잎이 매달려 있었다.


“나, 살릭툼은 반정령이란다. 태고의 버드나무숲이 내 고향이지.”


“반 정령? 전설에 나오는 그 정령……?”


“게르미노의 그 태고의 버드나무숲?”


아키피오와 시스가 동시에 묻고 동시에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래, 그 정령. 그러나 반만. 나의 반은 정령이지만 반은 인간이란다.”


살릭툼이 아키피오를 향해 말하고는 지팡이 끝으로 그의 다리를 슬쩍 건드렸다. 그러자 아키피오는 의자에 앉아 잠들어 버렸다.


“게르미노의 태고의 버드나무숲에 유령인지 요정인지가 산다는 소문이 있더니, 바로 살릭툼 님이었군요.”


“그렇게 볼 수도 있지. 하지만 꼭 그렇지도 않단다. 태고의 버드나무숲은 그 자체로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하나의 신비한 존재니까. 나는 그 숲의 일부일 뿐이고.”


늙은 살릭툼은 말을 하는 사이사이 밭은 숨을 몰아쉬었다. 그때마다 숲에서 나는 바람 소리 같은 숨소리가 났다. 살릭툼은 숨차 하면서도 괴로워하지는 않았고, 숨소리도 거칠기보다 경쾌하게 들렸다. 그러나 기력이 다해가고 있음은 분명했다.


“이십여 년 전에 나는 마침내 때를 만나서 나에게 맡겨졌던 소임을 다했고, 비로소 그 숲을 떠나 세상을 두루 돌아볼 수 있었단다. 나는 운이 좋았던 거야. 이제 나의 시간은 거의 다했지만 난 아주 기쁘고 평화롭단다.”


반 정령인 살릭툼에게는 수명이 있었다. 살릭툼은 300년을 살았고, 만약 지금까지 플라토르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플라토르인 아기를 만나 확인하고 축복해주지 못했다면 지금도 태고의 버드나무숲을 떠나지 못한 채 하염없이 기다리는 신세였을 것이다.


먼 옛날 버드나무의 정령과 인간의 결합으로 쌍둥이 자매가 태어났다. 한 아이는 정령의 피가 우세했고 한 아이는 인간의 피가 우세했다. 정령의 피가 우세한 아이는 숲으로 들어가 나무들의 주인이 되고 인간의 피가 우세한 아이는 인간의 마을로 가 인간들과 더불어 살았다.


나무들의 주인이 된 반 정령은 긴 세월을 통해 점점 나무로 변하고 숲으로 변했다. 반 정령은 주어진 수명이 다할 때 오래 묵은 버드나무를 깨워 자신의 힘과 영성을 불어넣고 살릭툼이라고 명명했다. 몇백 년마다 기존의 살릭툼은 소멸하고 새로운 살릭툼이 깨어났다.


정령으로서의 힘과 옛 기억은 새로운 살릭툼으로 깨어날 때마다 조금씩 약해졌다. 지금의 살릭툼은 깨어날 때부터 알았다. 자신이 인간의 모습을 한 마지막 살릭툼임을.


그리고 마지막 살릭툼에게는 신탁이 내려왔다. 언젠가 피리 부는 자가 이 땅에 올 것이라는, 그 아이를 기다렸다 확인하고 여신의 축복을 대신 전하라는 신탁이었다. 그렇게 살릭툼은 거의 평생을 신탁과 태고의 버드나무숲에 매여 살아야만 했다.


어찌 보면 라무스 플라토르가 살릭툼에게 자유를 준 셈이었다.


모든 기억이 한 순간에 살릭툼의 눈앞을 지나갔다. 그녀가 미소 짓는 까닭은 마지막 이십여 년 동안 세상을 떠돌며 쌓은 기억 때문이었다. 세상에는 나쁜 사람들도 생각보다 많았지만 언제나 더 많은 쪽은 선량하고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서 살릭툼은 아름다움을 보았다.


시스는 살릭툼의 초연함 앞에 괜스레 초라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실은 저의 시간도 다해가고 있어요. 그래서 저는 몹시 억울하고 서글프답니다. 이대로 죽고 싶지 않아서, 어떻게든 살 방도를 찾고 있는 중이고요.”


“이상하구나. 넌 아직 한참 젊은 데다, 내가 그러하듯이 보통의 인간들과는 다른데 무엇 때문에 벌써 죽어간다는 거지?”


살릭툼이 시스에게 가까이 다가서더니 손을 잡았다. 시스는 속으로 조금 놀랐다. 살릭툼의 손이 주는 느낌은 피와 살로 된 사람의 일부가 아니라 나뭇가지에 가까웠다.


“흑주술이구나.”


안타까움을 안고 살릭툼이 물러났다. 자신의 남은 힘을 다 써도 시스의 생명을 구할 수는 없었다.


“넌 물의 요정의 현신이지만 아직 봉인을 풀지 못했지.”


시스가 눈을 빛내며 냉큼 말꼬리를 잡았다.


“봉인, 그래요, 봉인! 아까 그 노래에서 지상에 남겨둔 맹세를 거두러 돌아온다는 건 봉인을 풀었음을 의미하는 거예요. 맞죠?”


“그래, 맞아. 어리석은 사랑의 노래는 나 이전의 한참 윗대의 살릭툼이 지어 불렀던 거야. 모든 살릭툼의 본질은 정령과 인간의 두 아이 중 정령의 피가 우세하여 숲으로 들어간 아이로 이어져. 그래서 내가 그 노래를 만들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닌 거란다. 아까 결투장에서 널 봤을 때 알았지. 너의 본질은 먼 옛날의 물의 정령이라는 걸. 너에게 알려주면 피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단다. 이 세상의 새벽과 밤이 부딪치고 물과 불이 뒤섞이는 것을 말이다.”


“전 봉인이 어떤 건지도 모르고 푸는 방법도 몰라요. 세상에 앙화를 가져올 생각 같은 건 더더욱 없고요. 그저 지금과 같은 평범한 인간으로 더 살고 싶을 뿐인 걸요. 그런데, 그런데.”


낙심한 시스가 지그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차마 입에 올리지 못한 말이 마음을 아프게 휘저었다.


‘내가 봉인이 걸린 채로 이대로 죽으면…… 새벽과 밤이 부딪치고 물과 불이 뒤섞일 일은 없겠죠. 그래야만 한다는 건가요?’


시스의 마음을 꿰뚫어 본 살릭툼은 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다. 그런 뜻이 아니었어.”


살릭툼은 내심 스스로를 나무랐다. 삼백 년을 살고도 이렇게 경솔하다니!



※ 설날에는 연재 쉬어 갈게요. 다음 회차는 20일(금요일)에 만나요. :-)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즐겁고 평안한 연휴 보내시기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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