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각이 짧았다. 미안하구나, 얘야.”
짧은 생각에서 비롯된 성급한 참견. 이건 반 정령에게 남아 있던 지극히 인간적인 면모였다. 살릭툼은 삼백 년 생의 마지막 이십여 년을 인간들 사이에서 보내면서 깨달았다. 자신의 안에도 먼 옛날 인간에게서 물려받은 일부분이 살아있었음을.
자유를 얻어 숲을 떠나기 전의 살릭툼은 인간을 만날 기회가 드물었다. 태고의 버드나무숲에 있는 옹달샘에 아이를 목욕시키러 오는 살리그네 여자들을 만나는 것이 전부였다. 그나마도 말은 나누지 않고 지켜만 보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근 280년 가까이를 살릭툼은 나무와 풀 그리고 동물들과만 교류했다. 그들은 결코 다른 개체의 생에 참견이든 충고든 하는 법이 없었다. 품을 수 있는 것은 품고 버릴 것은 버렸으며 그도 저도 아닌 것은 그저 두고 지나쳤다.
숲에서 살릭툼은 교감하되 개입하지 않았다. 그때는 그녀 또한 숲의 일부였으므로.
인간들 속으로 나온 살릭툼은 놀라고 또 놀랐다. 악하고 선해서, 지혜롭고 어리석어서, 냉혹하고 다정해서, 잔인하고 자비로워서……. 그리고 마침내 살릭툼은 생각지도 못했던 감정을 느꼈다. 인간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마음을 내어주고 마음을 받는 일. 그것이 살릭툼이 결론지은 인간의 일이었다. 인간의 일에 동화되면서 살릭툼은 비로소 자기 안의 외로움을 발견했다. 숲에서는 알지 못했던 거였다. 따뜻한 인간들을 만나 연결감을 느끼자 그 반대편의 외로움이 보였다.
살릭툼이 방금 범한 실수 즉 경솔한 조언은 기실 인간에 대한 애정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그녀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동안 시스는 그런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다.
“저는 제 삶을 잃고 싶지 않아요. 지금으로서는 아이테르 산을 찾아가는 방법뿐인 것 같은데, 혹시 어떻게 하면 거기에 갈 수 있는지 아시나요?”
미안함으로 살릭툼의 눈가가 축 쳐졌다.
“인간의 몸으로 거기에 가는 법에 대해서는 모른다.”
절반이 나무의 정령인 살릭툼은 아이테르 산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나 반 정령인 그녀조차 인간으로 사는 동안에는 발을 들일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럼 혹시 상티모니 족을 만난 적은요? 그들은 인간의 몸으로 아이테르 산과 이쪽을 오간다면서요?”
살릭툼은 상티모니라는 말을 작게 중얼거리면서 눈을 감았다. 그녀의 정신은 세상의 모든 나무들과 땅을 타고 아이테르 산까지 뻗어갔다. 잠시 후 눈을 뜬 살릭툼이 입을 열었다.
“상티모니 족은 엄밀히 보자면 보통의 인간들과는 다른 종족이지. 그리고 상티모니의 여인들은 명맥이 끊어진 지 오래란다. 아이테르 산의 상티모니 언덕에도 그들은 남아 있지 않아.”
“그럼 혹시 알리페르에 대해 아세요?”
시스가 절박한 목소리로 물었다. 살릭툼에게는 아무것도 숨길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리페르…… 상티모니 언덕에 있더구나.”
살릭툼은 볼 수 있었다. 새하얗게 만발한 심장꽃의 군락 사이에 앉아 슬픈 눈으로 연못을 응시하던, 크고 아름다운 날개를 지닌 유니콘을.
“어떻게 해야 그를 만날 수 있을까요?”
“가야겠지. 아이테르 산으로, 상티모니 언덕으로.”
결국 이야기는 다시 원점이었다. 시스는 가슴이 답답했다.
“그를 이리로 부를 수는 없는 건가요?”
“지금의 나와 너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야.”
살릭툼이 반 정령이 아닌 온전한 정령이었다면 아이테르 산의 알리페르와 소통할 능력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살릭툼은 반만 정령이었고, 오랫동안 소멸과 깨어남을 되풀이하는 동안 영능이 약해졌다. 더욱이 지금의 그녀는 수명이 거의 다해 쇠잔해진 상태였다.
“나는 주어진 수명을 다 살았고 이제 태고의 버드나무숲으로 돌아가 소멸을 맞아야 한단다. 마지막으로, 너에게 도움이 될지 어떨지 모르겠다만 몇 가지 말해 주마.”
암녹색의 눈동자가 한층 더 어두워진 살릭툼이 달래는 듯 부드럽게 말했다. 시스는 그녀가 시시각각 나무와 비슷하게 변해간다는 생각을 하면서 작은 소리로 고마움을 표했다.
“방금 내가 본 알리페르는 슬픈 눈으로 포라멘 연못을 들여다보고 있었단다. 포라멘 연못은 상티모니 족이 아이테르 산과 이쪽을 오가는 통로였지. 포라멘 연못과 이쪽의 어느 곳이 어떤 식으로 이어져 있는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이쪽의 통로가 한 군데가 아니라 여러 군데라는 건 알고 있다. 상티모니 여인들이 출몰했다는 얘기가 티토니아의 여러 나라에 전해지고 있으니.”
듣고 있던 시스의 눈에 다시금 희망의 불씨가 지펴졌다.
“포라멘 연못으로 이어지는 장소를 찾으려면 옛날 상티모니 여인들에 대한 이야기가 전하는 곳을 찾아 조사해 봐야겠군요.”
“꼭 성공해서 네가 삶을 계속 그리고 원하는 대로 마음껏 살아가기를 바란다.”
거의 나뭇가지에 가까워진 손가락으로 살릭툼은 시스의 손을 살포시 잡았다. 시스도 잠시 그 손을 맞잡았다.
살릭툼은 마지막으로 기운을 모아 다시 음유 시인의 모습을 하고는 자리를 떴다. 그녀가 스치고 간 커텐은 흔들리지 않았고 그녀의 걸음은 허공을 딛는 듯 소리조차 없었다.
“아키피오, 일어나.”
긴 의자에 기대어 잠든 그를 시스가 가볍게 흔들어 깨웠다.
“그분은? 정령 할머니 말이야.”
눈을 뜬 아키피오가 두리번거리며 외치다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가셨어.”
“아아, 난 왜 갑자기 잠들어 버린 거지? 정령하고 대화해 볼 기회였는데.”
아키피오는 양팔로 머리를 감쌌다. 그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그득했다. 시스는 네가 잠든 게 아니라 살릭툼이 재운 거라고 말해줄까 하다 생각을 바꾸었다.
“무슨 얘기를 나눴어? 나 잠든 동안에?”
호기심에 차서 아키피오가 물었다.
“내 운명에 대해서.”
진담인지 농담인지 모를 표정으로 시스가 웃었다.
“그래서? 넌 어떤 운명이라는데?”
“지금처럼 특별할 것 없는 삶을 살아갈 거래. 그리고.”
시스가 비밀을 털어놓듯 소곤소곤 덧붙였다.
“내가 조만간 왕비의 손아귀에서 무사히 도망칠 수 있을 거라더라. 그게 다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