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키피오는 피식 웃으며 손을 툭툭 털었다.
거짓말인 줄 알지만 기분 나쁘지 않다는 뜻이었다. 자신이 잠들었던 원인에 대해서도 짐작이 갔다. 그 반 정령인지 하는 할머니가 일부러 잠들게 만든 듯했다. 그렇다면 그녀와 시스 사이에 오간 말에 대해서는 관심을 끊어 주는 것이 옳다고 아키피오는 생각을 정리했다.
“솔직히 나는 운명이니 예언이니 하는 건 믿지 않는 편이야. 하지만 시스 너는 믿어. 그래서 방금 말한 것처럼 네가 티티아 왕비 전하로부터 벗어났으면 좋겠고, 너답게 살아가기를 바라지. 그런데 말이야, 시스.”
한 가지 아키피오의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었다.
“넌 우리 가족의 친구야. 그러니 만약 너에게 우리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긴다면 그때는 머뭇대지 말고 망설이지도 말고 도움을 청해. 너에게는 영특하고 독특한 새 페로가 있잖아. 그 녀석을 보내라고.”
아무래도 시스의 신변에 자신이 모르는 무슨 일이 있는 듯했다. 그녀는 변함없이 쾌활했지만 지난 해 텔룸에서 봤을 때처럼 생기 가득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콕 집어 설명할 수는 없지만 뭔가 서두르는 사람 같기도 했다.
“그 말 기억해 둘게. 고마워, 아키피오.”
시스가 커튼을 젖히고 막 나서려는데 앞쪽에 한 겹 더 쳐진 커튼 너머에서 헛기침 소리가 났다. 뒤이어 티티아 왕비가 들어섰다.
“시스. 대사제가 급한 전갈을 보내왔다. 널 지금 바로 돌려보내 달라는구나.”
티티아의 말투와 얼굴에 못마땅한 심정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반면 시스는 낯빛이 밝아졌다. 오늘의 연극은 여기까지, 라고.
최초 사원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시스는 살릭툼에게 질문했으면 좋았을 한 가지를 뒤늦게 떠올렸다. 님파의 서, 거기에 숨은 뜻에 대해 물어봤어야 했다고. 살릭툼도 모를 수도 있고, 알면서도 말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마차의 작은 창 너머로 지나가는 검은 밤 풍경에서 불현듯 시스는 파트로나의 눈동자를 떠올렸다. 번개 반도의 도채비족 파트로나. 그녀의 두 눈에서 시스는 각기 다른 자신의 모습을 보았고, 파트로나는 그것이 예언일 거라고 했다.
어느 쪽도 시스가 원하는 미래가 아니었는데. 파괴자의 모습도, 희생자의 모습도.
시스는 문득 소스라치며 팔을 문질렀다. 겨울에조차 추위에 민감하지 않은 시스를 선득한 한기가 엄습했던 것이다. 이렇듯 온화하고 쾌적한 여름밤에.
*
라무스는 침대 옆으로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에 잠을 깼다. 그는 번개같이 베개 아래의 단검을 쥐고 몸을 굴렸다. 본능적이기도 했고 오랜 기간 반복해서 훈련한 결과이기도 했다. 그는 순식간에 침입자의 목에 날 끝을 겨누고 섰다.
불을 끄지 않고 잠들었기에 촛불이 여전히 타고 있었다. 눈이 빛에 익숙해지면서 침입자의 모습을 제대로 확인한 라무스는 일단 뒤로 물러났다. 단검은 여전히 든 채였다.
침입자의 눈에는 살기나 적의가 전혀 없었다. 또한 침입자는 너무 늙었고, 지팡이를 짚었으며 사람보다 나무를 닮아 있었다.
“아주 날래구나.”
나무를 닮은 노파가 방긋이 웃었다. 그제야 라무스는 다친 부위에서 다시 통증이 시작되었음을 알았다. 라무스는 어금니를 지그시 물고 노파를 향해 의문의 눈길을 던졌다. 아직 단검은 거두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널 보고 가야겠어서 온 거란다. 우린 꽤 오래된 사이거든. 기억이 없다고? 그럴 수밖에. 넌 그때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기였으니.”
노파의 말에 라무스는 태고의 버드나무숲과 옹달샘을 떠올렸다.
“그래. 거기에서 만났었어. 나 살릭툼은 네가 플라토르임을 확인해주었고, 그럼으로써 버드나무숲을 떠날 수 있는 자유를 얻었단다.”
라무스는 단검을 치웠다. 그러자 살릭툼은 의자로 가 앉았다.
“마지막이라니, 무슨 말씀이시죠?”
라무스는 침대에 대충 걸터앉았다. 부상의 고통 때문에 미간이 절로 일그러졌다.
“말 그대로다. 나는 이제 태고의 버드나무숲으로 돌아간단다. 빗대어 하는 표현이 아니라 진짜로 그 숲에 스며드는 거야. 원래 거기에서 왔으니까. 저런, 많이 다쳤니?”
“심각한 건 아닙니다.”
“그래도 많이 아파 보이는구나. 내가 가까이 가도 되겠니?”
“그러시죠.”
살릭툼은 라무스에게 다가가 지팡이로 그의 팔을 살짝 건드렸다.
“이제 안 아프지?”
라무스는 신기한 것을 보는 듯 두리번거렸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조금 흐릿해진 것을 알 수 있었다.
“나와 얘기하기 위해 꼭 깨어 있을 필요는 없으니까.”
“지금 제가 꿈을 꾸고 있다는 말씀이시죠?”
“맞아. 하지만 꿈인 동시에 실제니까 깨고 나도 다 기억날 거야.”
“저를 왜 찾아오신 겁니까?”
“처음에는 먼발치에서 보고 말 작정이었단다. 네가 어떤 청년이 되어 있을지 궁금해서.”
“그런데 왜 마음이 바뀌셨어요?”
서늘한 불안이 라무스의 가슴으로 불어들었다. 뒷목덜미에 차가운 소름이 돋았다.
“네가 하필 그 레이디에게 승리의 치하를 청하는 걸 보고 말았으니까.”
“그녀는 시스예요. 우린 아는 사이고요. 시스에게 왜 하필이라는 말이 붙습니까?”
“그녀는 물의 요정이었어. 아주 오래 전에 말이다. 그녀가 진정한 자신을 깨우면 세상이 혼란스러워질 수도 있어. 나는 정령도 인간도 아닌 존재고, 오랜 세월을 지나오는 동안 옛 기억이 점점 흩어졌지만 인간에게 배신당하고 분노 속에 스스로 소멸을 택했던 물의 요정이 있었다는 걸 기억하고 있어. 상세한 기억은 아니지만.”
라무스는 번개 반도의 파트로나가 해준 말을 상기했다. 시스가 ‘다른 피’라던 말. ‘다른 피’이기에 풀게트 반도에서 그녀의 모습을 한 검은 기사가 나타나지 않았다던.
일단은 다행스러웠다. 시스가 ‘다른 피’ 중에서 각성 전의 마가가 아닌 요정이라는 사실이. 그러나 이내 마음이 불편해졌다. 방금 전 살릭툼이 한 말 때문에. 그녀가 진정한 자신을 깨우면 세상이 혼란스러워질 수도 있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