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다음 순간 라무스는 살릭툼의 말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해석해 보는 자신에게 스스로 화들짝 놀랐다. 이런 해석이었다.
‘시스가 정말로 물의 요정의 화신이라면. 진정한 자신을 깨운다는 건 인간이 아닌 요정으로 돌아간다는 뜻일 텐데. 요정은…… 인간의 수명과 운명을 벗어나 있으니까…… 그렇게 되면, 그녀가 죽음을 면할 수 있는 거 아닐까.’
“제가 아는 시스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그런 짓을 저지르지 않을 겁니다. 그녀는 이 세상을 그리고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좋아하는 걸요.”
그래서 그녀는 죽고 싶지 않은 것이다. 좀 더 충분히 만끽하고 지켜보고 사랑하고 싶어서. 세상을, 사람들을. 시스가 직접 이런 말을 입에 올린 적은 없지만, 라무스가 보는 그녀는 그런 사람이었다.
“요정으로 각성하면 인간 시절의 감정은 사라질 게다. 물의 요정이 돌아온다면 그건 복수의 맹세를 지키기 위해서일 테니.”
살릭툼의 목소리는 착잡하게 가라앉았다.
“복수의 맹세라고요? 확실한 겁니까?”
“그런 맹세가 있었다는 건 사실이야. 몹시 처절한…… 온 티토니아의 대지에 번지고 초목에 스며들 정도로 사무치는 핏빛의 맹세였단다. 내가 기억하는 건 이 정도뿐이야. 너에게 더 많은 걸 알려주지 못해서 안타깝구나.”
이제야 살릭툼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진정으로 깨우쳤다. 라무스에게 알려줘야 할 것이 하나 더 있음을. 그러나 도저히 그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너희 둘은…… 친구니?”
두 사람이 가까워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셈이에요. 우린, 함께 많은 일을 겪었고 죽을 고비도 넘겼습니다.”
청보라에 가까운 깊은 푸른색 눈에 고뇌가 깃들었다.
“그랬구나.”
눈꺼풀을 파르르 떨며 살릭툼이 씁쓸하게 끄덕였다. 차마 말할 수 없었다. 피리 부는 자 플라토르가 마침 이 시기에 세상에 온 까닭을 이제야 알겠다고. 네가 물의 요정의 복수를 막을 대적자라고. 기실 말해줄 필요도 없었다. 플라토르인 이상 결국 그 길을 가게 되어 있으니.
“플라토르는 신조와 신수를 소환할 수 있지. 결투장에서 봤다. 불새가 마른번개를 일으켜 널 돕는 것을.”
평범한 인간들의 눈에야 말간 하늘에서 느닷없이 치는 번개밖에 안 보였지만 살릭툼의 눈에는 빛으로 휩싸인 불새의 눈부신 자태가 똑똑히 보였던 것이다.
“페로 말씀이시군요. 아니에요. 페로는 시스의 새입니다. 그녀가 루쿠스에서 주운 석귤에서 나왔다더군요.”
아까보다 더 인간의 모습이 지워지고 나무의 모습이 확연해진 살릭툼을 향해 라무스는 굳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 그랬다 해도 그 새는 물의 요정의 새가 아니야. 물론 엄밀히는 네 새도 아니고. 불새는 신조다. 어느 누구의 소유도 될 수 없지. 그리고 모르긴 해도 그녀가 불새의 부화에 관여하게 된 건 우연이야. 아마 네가 각성시키기 전까지는 미숙한 보통 새에 불과했을 거야. 이쪽 세상에서 부화했다면 그럴 수밖에 없지. 생각해 봐라. 아마 네가 그 새를 깨운 일이, 뭔가 짚이는 게 있을 텐데?”
내가 불새를 깨웠다고? 라무스의 귓가에 페로의 가늘고 높은 비명 소리가 되살아났다. 맞아! 풀게트 관문에서!
거기서 죽어가는 시스를 위해 약지의 피를 내어 그녀의 입에 흘려 넣던 중에 페로에게 핏방울이 튀었었다. 비명을 지르며 하늘 높이 날아올랐던 페로는 라무스가 또 다른 자신인 검은 기사를 만나 악전고투하던 중에 다시 돌아왔다. 화려하고 강력한 불새가 되어서.
“알 것 같습니다. 그럴 만한 일이 있었어요.”
“풀게트 관문에서였구나.”
라무스의 생각을 읽은 살릭툼이 조금 놀란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그가 번개 반도에 다녀왔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어떻게 아셨죠?”
“방금 네가 떠올린 기억을 조금 엿볼 수 있었다. 아주 강렬한 기억인 데다 나는 반 정령이니까. 게다가 네 어머니 쪽 혈통을 따라 멀고 먼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가 이어져 있으니 다른 사람보다 네 기억을 보는 것이 조금은 수월하지.”
“그건 또 무슨 말씀입니까?”
“까막득한 그 옛날, 정령과 인간의 결합으로 태어난 두 아이 가운데 한 아이는 마을로 내려가 인간과 결혼해 인간으로 살았지. 그 아이가 살리그네의 선조란다.”
인간과 결혼한 반 정령 아이가 함구했기에 완전히 잊힌 사실이었다.
“그래서였나 보군요. 살리그네의 직계 혈통을 이어받으면 땅과 초목의 사랑을 받는다고들 하는 것이.”
“나의 친척들은 아무리 위험한 지대에서도 깊고 거친 숲에서도 길을 잃는 법이 없지. 얘야, 이제 내 시간이 다 됐구나.”
바람에 스치는 나뭇잎들이 사각대는 듯한 목소리를 내며 살릭툼이 웃음 지었다. 그녀가 점점 목소리 내는 것을 힘들어 한다는 걸 라무스도 알 수 있었다. 이제 그녀는 거의 나무였다. 몸과 얼굴은 나무 등걸이고 팔다리는 가지, 손가락은 잔가지였다.
어느덧 살릭툼 전체가 반투명한 먼지로 이루어진 신기루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잠깐만요. 하나만 더 답해 주실 수 없습니까? 님파의 서는요? 그 노래의 비밀을 풀면 루쿠스를 잠재우고 님파 라쿠스를 녹여 상상도 못할 힘과 보물을 얻을 거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아니야. 그건 속임수야. ……가 사람들을 현혹…….”
나무 형체였던 희푸른 먼지가 투명하게 빛나면서 해체되고 흩어져서는 창밖으로 날아갔다.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먼지를 움켜쥐려던 라무스는 허망하게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살릭툼의 흔적은 이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녀는 태고의 버드나무숲으로 돌아간 것이다.
라무스는 자신의 손 안에 무언가가 남은 느낌에 손바닥을 펴 보았다. 손가락보다 작고 가는, 세 개의 잎이 붙은 나뭇가지였다. 나뭇가지는 푸르고 낭창낭창하고 싱싱했다. 언제까지나 시들지 않을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