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새벽 라무스는 잠에서 깨자마자 손 안을 확인했다. 과연 버드나무의 작은 가지를 쥐고 있었다. 살릭툼이 남긴 편린. 그것은 여전히 생생했다.
뭔가 의미나 쓸모가 있을지도 모르지. 라무스는 잔가지를 품안에 숨겼다.
자는 사이 부상 부위의 통증이 대폭 완화되었음이 느껴졌다. 싸맨 천을 풀어 보니 어깨와 옆구리 모두 상처가 잘 붙어 움직여도 벌어지지 않았다.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른 회복세였다. 유심히 살피자 상처를 넓게 덮은 희푸르고 빛나는 가루 같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디위나의 치료도 훌륭했겠지만 살릭툼의 도움도 있었음이 분명했다. 그래도 아직 다 자유롭게 몸을 쓸 정도는 아니었다. 라무스는 다시 침대에 누웠다. 수많은 사념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머릿속에서 명멸했다.
시데레온에 대한 책임감과 아버지를 위한 복수, 아바루스 왕과 인형 기사에 대한 의문, 살릭툼이 속임수라고 했던 님파의 서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은 세력들과 그들의 각축, 외할아버지와 어머니의 안부. 그리고…… 시스.
어쩌면 모든 것이 하나의 연결 고리로 이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창문에서 톡톡 소리가 났다.
“페로.”
라무스는 반갑게 부르며 창문을 열었다. 페로의 공 같은 흰 몸이 안으로 날아 들어오더니 탁자 위에 앉았다. 그러고 보니 페로의 흰 이마와 부리에 아직도 붉은 점이 남아 있었다. 빛깔이 조금도 바래거나 탁해지지 않은 선홍빛 점은 라무스의 피가 튀면서 생긴 것이었다.
페로는 블랙 오팔처럼 오묘하게 빛나는 눈으로 라무스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뭔가를 요구하는 것 같기도 했지만 라무스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나는 시스가 아니라서 네 마음의 소리를 듣지 못해.”
불평하듯 라무스가 말하자 페로는 살짝 인상을 쓰면서 몸 전체로 도리질을 쳤다. 한심해 하거나 비웃거나 꾸짖거나, 적어도 셋 중 하나의 뜻이라는 것 정도는 라무스도 낌새챘다. 이유도 모르고 혼나는 기분이었다.
도대체 뭐가 불만인 거냐. 난감하게 페로를 바라보던 라무스는 그 새를 보내 버릴 수단을 생각해냈다. 그는 어제 디위나가 ‘혹시 필요하실지도 몰라서.’라는 말과 함께 전해준 문구 상자를 열었다. 깃펜과 잉크, 종이가 들어 있었다.
라무스는 짧게 몇 줄 적은 종이를 돌돌 말아 페로의 부리 앞에 내밀었다.
“가서 전해.”
페로는 순순히 부리로 종이를 물더니 훨훨 날아갔다.
날이 밝자 디위나가 약 상자를 가지고 찾아왔다.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었다. 푸실라가 아침 식사를 들고 그녀를 따라왔다.
“와고르 님. 레이디 페르비아의 말씀을 전할게요.”
식사를 담아온 트레이를 내려놓은 푸실라가 그 위에 덮인 천을 걷더니 끈으로 봉한 불룩한 주머니를 가리켰다.
내용물은 굳이 들여다볼 것도 없이 짐작이 갔다. 라무스는 묵묵히 앉아 아침을 먹기 시작했다. 포도 향이 나는 자고새 구이는 카푸의 명물답게 미끄러지듯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금화를 넉넉히 넣으셨대요. 인사는 필요 없으니 바로 떠나시래요.”
푸실라는 죄 지은 사람처럼 라무스의 눈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어제 페르비아가 라무스에게 얼마나 화가 났는지 푸실라가 제일 잘 알았다. 페르비아는 결투장에서 자신이 대단한 치욕을 당했다고 여겼다. 페르비아가 참지 않으리라는 것도 푸실라가 가장 잘 알았다.
“분부대로 하겠다고 전해. 이거, 예상보다 빠르게 자유의 몸이 됐군.”
라무스의 말에 푸실라는 까딱 고개인사를 하고 뒤돌아 나갔다. 디위나는 라무스가 식사를 끝내기를 묵묵히 기다렸다. 멀어지던 푸실라의 발소리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가까워졌다. 그러더니 그녀가 다시 문을 벌컥 열고 뛰어들었다.
“디위나 님! 디위나 님께서 와고르 님을 도와주세요. 레이디 페르비아께서 화가 아주 많이 나셨어요. 제 말, 무슨 뜻인지 아시지요?”
푸실라는 겁에 질린 채 나직하고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알았다, 푸실라. 알았어. 그러니 침착하렴. 아무 일 없었다는 얼굴로 돌아가도록 해.”
“저와 도키가 와고르 님께 은혜를 입었어요. 와고르 님이 아니었으면 저는 산양뿔 주점 마당에서 레이디 페르비아의 손에 목숨을 잃었을 거예요. 또 만약 와고르 님이 폴루스 니두스에서 몰래 도망쳐 사라지셨어도 저와 도키는 죽은 목숨이었죠. 와고르 님, 고마웠어요.”
양심에 거리끼던 것을 실토하고 홀가분해진 푸실라가 마침내 고개를 들고 라무스를 바로 보았다. 라무스는 별 것 아니라는 듯 옅은 웃음을 보였다.
표정을 가다듬은 푸실라가 방을 나가자 디위나가 약 상자를 열면서 말했다.
“금화 주머니가 너무 두둑하다 싶었습니다. 이렇게 된 이상 노출된 길로 나서지 않으시는 게 좋습니다. 레이디 페르비아는 남의 생명을 너무 가볍게 여기시지요. 성문을 나서는 순간 어느 방향에서 화살이나 단검이나 장검이 날아올지 모르는 일입니다.”
“비밀 통로라도 안내하겠다는 말이오?”
식사를 마친 라무스가 입과 손을 닦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제가 비밀 통로는 모르지만 우두머리 요리사와 친합니다. 식자재를 들여오는 수레가 나갈 때 종종 그가 성 밖의 빈민들에게 나눠줄 음식들을 실어 내보내는데, 그 음식들 사이에 숨겨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성문을 나서는 순간, 이라고 했으니 이 성 안에서는 레이디 페르비아가 나를 죽이지 않을 거라는 뜻이겠군. 어째서 그런 거요?”
“아바루스 전하께서 그런 꼴을 용납 못하실 테니까요. 레이디 페르비아라 해도 왕의 코앞에서 제멋대로 사적인 살인을 저지를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레이디 페르비아께서 아바루스 전하께 결투장의 그 일을 자신이 치욕스러워한다고, 그래서 와고르를 죽여야겠다고 허락을 구할 수도 없는 일이지요. 그러자면 이미 구겨진 자존심을 자신의 입으로 한 번 더 구겨야 하니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