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무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디위나는 그가 왜 그러는지 알겠다는 표정이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그랬습니다. 오직 자기 자신만이 중요했지요. 자기가 가장 잘난 줄로 알고, 거슬리는 것을 참거나 견디지 않았습니다.”
페르비아의 인간성에 대한 설명이었다.
“그런 성향은 자라면서 점점 더 심해지고 확고해졌지요. 자신의 만족이나 분풀이를 위해서라면 누군가의 목숨도 쉬이 빼앗아 버릴 만큼 말입니다. 가장 무서운 건 그녀가 언제나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옳은 사람이라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부류의 인간을 라무스도 본 적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그들은 페르비아만큼 위험하지는 않았다. 페르비아가 가진 높은 지위와 대단한 권력이 그들에게는 없었기 때문이다.
“기막힌 노릇이군. 주위 사람들이 안됐기도 하고 말이오.”
“결국 두려움에서 비롯된 형식적 충성에 둘러싸이는 것이지요. 방금 푸실라를 보셨듯이 말입니다.”
“내가 도망치면 푸실라가 의심받을 수도 있겠군요.”
“만약 그리 되면 제가 푸실라를 돕겠습니다. 여기 함께 왔고 푸실라가 먼저 돌아갔으니, 푸실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레이디 페르비아께 말씀드리지요.”
그것은 곧 푸실라가 한 일을 디위나가 뒤집어쓰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뒷일은 불을 보듯 뻔했다.
“일을 그렇게 만들고 싶지 않소. 푸실라가 미리 알려준 건 고맙지만, 실은 처음부터 도망치는 방식으로 해결할 마음도 없었다오.”
디위나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우두머리 요리사를 통해 몰래 도망시켜주겠다고 말하면서도 어쩌면 저분은 다른 계획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 비슷한 게 있었던 것이다.
“어찌하실 작정이십니까?”
“루크룸 말이오.”
“시종장에 대해 궁금하신가 보군요.”
“그에 대한 왕의 신임이 어느 정도요?”
“거의 최고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재상 암비티오와 시종장 루크룸이 왕과 가장 가깝습니다.”
“루크룸을 만나게 해주시오.”
“그 전에 상처를 보겠습니다.”
라무스는 디위나의 말을 따랐다. 상처를 풀어본 디위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잠시 멍하니 있었다.
“제 약은 더는 필요가 없겠습니다.”
이미 너무도 빠르고 순조롭게 낫고 있었던 것이다. 디위나는 맑고 은은한 빛을 머금은 희푸른 가루약이 무엇인지 궁금했지만, 자신이 꼬치꼬치 물을 필요가 없다는 것도 알았다. 그녀는 가져온 깨끗한 천으로 상처를 싸매주는 것으로 처치를 끝냈다.
“시종장에게로 안내하겠습니다. 따라오십시오.”
루크룸의 집무실로 가는 동안 틈틈이 디위나는 목소리를 낮추어서 페르베아투 궁정의 내부 사정을 아는 대로 알려 주었다.
“두 재상 중에서 암비티오는 왕을 무조건적으로 떠받들고 있고, 세리우스는 직언을 하는 쪽입니다. 그렇다 보니 아무래도 세리우스 공은 좀 소외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루크룸과 세리우스의 관계는 어떻소?”
“드러나게 대립한 적은 없습니다만 모든 면에서 서로 겉돈다고 보시면 됩니다.”
“아랫사람들이나 평민들은 셋 중 누구의 험담을 제일 적게 하나요?”
“세리우스입니다. 엄격한 측면이 있기는 해도 괜한 트집은 잡지 않고 공정한 편이니까요.”
루크룸의 집무실은 왕과 왕비의 거처가 있는 아르쿠스 성채에 있었다. 아르쿠스 성채는 로스 레갈리스의 심장부였다. 디위나는 아르쿠스 성채의 위병에게 은화를 건네며 라무스 즉 와고르를 루크룸에게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다.
위병은 루크룸에게 자신이 와고르를 그의 앞에 데리고 온 경위를 은화 얘기만 빼고 있는 그대로 보고했다.
“디위나 할멈이? 알았다. 나가 봐.”
위병을 내보낸 루크룸이 킥킥거리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니까, 와고르. 왕의 친위대에 들어오고 싶다는 것이지? 나에게 그 목숨을 구걸하러 온 것이지?”
레이디 페르비아가 라무스를 죽이려 한다는 것을 루크룸은 단박에 알아차린 것이었다.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그러니 저를 구명해주실 수 없으시다면 바로 말씀해 주십시오.”
“레이디 페르비아의 심기를 그토록 심히 거슬렀으니 내가 안 받아주면 꽁지가 빠져라 도망쳐도 소용없을 텐데?”
루크룸은 빈정대면서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죽을 때 죽더라도 있는 힘껏 발버둥은 쳐봐야지요.”
라무스는 루크룸이 자신을 내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사람을 가지고 놀고 있기는 해도 기분이 적잖이 좋아 보였으므로.
“좋은 태도야. 알았네. 레이디 페르비아가 어찌하지 못하도록 친위대에 넣어 주지. 어쩌면 와고르 네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해줄지도 모르겠다는 예감이 들거든. 참, 부상 입은 건 좀 어떤가?”
“피는 좀 흘렸으나 다행히 상처가 생각보다 가볍습니다. 그리고 디위나 님께서 치료를 잘 해주셔서 문제없습니다.”
“그래? 모든 것이 다 술술 풀리는군. 좋은 일이야. 그렇고말고. 안 그런가?”
한참 벗겨진 둥그런 이마를 빛내며 루크룸이 또 활짝 웃었다. 라무스는 떠돌이 기사 와고르의 얼굴로 그의 비위를 맞추듯 슬쩍 따라 웃었다.
“저야 일단 언제 어디서 날붙이가 날아올지 모르는 위협으로부터 벗어났으니 더할 나위 없다고 봐야겠지요.”
하지만 라무스의 마음속에서는 경계심의 싹이 조심스레 돋아났다. 루크룸의 언행에는 알게 모르게 과장된 구석이 있었다.
루크룸은 책상에 앉아 종이에 몇 자 적더니 봉투에 넣고 밀랍으로 봉해 반지 인장을 찍었다. 그러고는 설렁줄을 당겨 자신의 전속 시종을 불러들여 명했다.
“이걸 친위대장에게 전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