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서 깨달은 것
죽음의 문턱 앞을 다녀왔다. 청소년기 이후로는 두 번 다시 갈 일 없을 줄 알았는데, 세상은 날 가만두지 않는다. 나아가려고 하면 끌어내리고, 아득바득 살아가려 하면 어떻게든 내려친다. 그렇게 잠시 죽음의 문턱 앞을 다녀왔다. 죽음의 세계로 들어갈 수도 있었는데 어쩌다 보니 살아있다. 그래서 그냥 살아간다.
당신은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인가.
태어났더라도 죽음을 택할 수 있었는데 지금 이 순간까지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제는 끝일 것 같던 고통이 숨 쉬듯 다가오는데도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인가. 반드시 이뤄내고 싶은 꿈? 내 어깨에 수북이 쌓인 책임감? 세상을 향한 애정 어린 마음? 그대를 사랑하는 수많은 존재들? 경험해보지 못한 숱한 놀거리들?
오랫동안 찾아 헤맨 '삶의 이유'는 더 이상 나에게 존재하지가 않는다.
내 안에서 꿈꿔왔던 수많은 것들은 세상이 앗아가고, 죽으라고 짓밟는다. 나를 얼마나 대단한 사람으로 키우려고 이런 모진 시련을 주나 싶을 정도로 삶의 이유가 사라진다. 나의 유일한 숨통이었던 글쓰기조차 내가 가장 힘들어하는 '가족'이라는 존재와 엮어버린다. 그나마 마지막까지 붙들고 있던 것인데 그 유일한 희망조차 뺐어 버리고 나에게 남겨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난 죽음을 택한다.
난 무책임한 사람이다. 난 나약한 사람이다. 난 이기적인 사람이다. 난 쓸모없는 사람이다. 난 욕심이 많은 사람이다 : 이와 같은 말들로 죽음을 정당화한다. 그런데 죽음 앞에서 깨달은 것이 있다 : 난 책임감이 너무 강한 사람이다. 난 너무 착한 사람이다. 난 완벽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난 이뤄내고 싶은 게 많은 사람이다. 난 정의를 실현하고 싶은 사람이다. 난 너무 좋은 사람이다.
이 많은 것들을 깨달았기에 죽음의 세계로 들어가지 않은 것이 아니다. 무서워서 못 들어간 것뿐이다. 죽음의 앞에서 잊고 있었던 사실은 난 고소공포증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걸 깨달아서 마치 못해 살아있는 것이다.
책임질 자신이 있어서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이뤄낼 자신이 있어서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정의를 실현시킬 수 있을 것 같아서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을 감당할 자신이 있어서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좋은 사람이라서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삶의 이유가 뚜렷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행복한 일로 가득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그저 살아있기에 살아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