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년 만에 나는 졸업한다.
회사라는 돈 받고 다니는 학교
이제 며칠 뒤면 나는 29년 만에 졸업한다.
회사는 '돈을 받고 다니는 학교'라고 했었다. 6년, 3년, 3년 정해진 시간을 잘 보내면 자의든 타의든 새로운 학교로 입학할 수 있었다. 그리고 대학교를 졸업하면 회사로 마땅히 취업해야 하는 것이 정석이었던 것처럼 나는 회사라는 학교로 의심 없이 안정적으로 입학했다. 돈을 받고 다니는 학교는 돈을 주고 다니는 학교와 가장 큰 차이가 내가 졸업 시점을 정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29년간 나는 이 학교를 졸업하지 못했다. 이제 막 졸업을 하라고 통보를 받고 나서야 자발적으로 내가 정하지 못했던 시간들, 순간순간들이 여기저기 흩어진 물건들처럼 걸리적 거린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나는 카페 구석에 앉아서 몇 년간 쌓여있던 사무실 책상 속 물건들을 하나하나 정리하는 마음으로 묵은 감정들을 거둬내는 의식을 거행하고 있다. 아니 뭐라고 해도 좋겠다. 끄집어내어 보고 싶었던 The internal Only 문서 인지도...
10,244
내가 첫회사인 이곳에 몸 담은 근무일수다. 내가 일수를 하나하나 따져가는 덕후는 아니고 회사가 언제부터인가 직원들에게 회사에 근무한 일수를 꼬박꼬박 알려주고 있다.
한 직장에서 오래 성실히 근무하는 것이 미덕이었던 그때 그 시절에 나는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일을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IMF로 평생직장이 아닌 평생직업이란 개념이 핫하게 회자되었었고 구직 당시 운이 좋았던 것이었는지 그때도 좋은 직장으로 분류되었던 1 금융권 은행을 포기하고서 지금의 회사를 선택했었는데 그 은행이 IMF를 맞아 동시대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깊은 슬픔을 남기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렇게 대기업도 망할 수 있고 내 일자리도 같이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사회초년생 시절에 알게 되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나에게는 타인의 일이었고 운 좋게 피해 간 슬픈 남의 얘기 일 뿐이었다. 나는 아직 어리고 성장의 가능성이 많다고 회사는 분류하고 있었으니까.
섣부른 경험을 들추어 남기고 싶지는 않다. 나도 세월과 지나가는 한 시절의 개인 일뿐 더도 덜도 아니다. 그러나 세상에 드러나는 이야기들은 자서전적 성공스토리가 많고 수많은 자기 계발서도 그렇듯 왠지 나는 안될 것 같은 좌절감을 안겨 준다.
"대기업에 다니는 서울자가 김 부장" 이야기가 직장인 사이에서 뜨거운 관심을 받더니 책으로 출판되기도 하고 곧 드라마화된다는 얘기도 솔솔 들렸었다. 사실적인 직장생활과 동시대를 살고 있는 다양한 세대의 사람들 얘기를 재미나게 풀어내고 있는지라 회사 내에서 패러디되어 각종 직급의 우리들의 얘기로 웃픈 농담을 주고받기도 했었다. 나 역시 대기업에 다니는 서울자가 김 부장이다. 지방의 국립대학교 비인기과를 졸업해서 회사 내 학교선배도 없어 인맥도 없고 동기들에 비해 특출한 능력이나 경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나는 첫 대졸 공채 여자 신입사원이었다.
나는 이 공간을 통해 대기업이라는 정글에 최하층 계급에서 조직을 지탱해 온 특별하지 않으나 독특했던 나의 경험을 나누고 싶다. 어쩌면 실패사례가 더 많고 아무것도 아닌 경험인 데다 사적인 의견이라 조심스럽지만 사회생활을 처음 시작하는 아들 딸 같은 후배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하는 마음으로 적어본다. 너무 겁내지 않아도 된다는 응원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