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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개 경 Mar 16. 2018

카프카의 <성>

십 년 만에 카프카의 (성)을 다시 읽었다. 당시 독서기록장(2007.9.15)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무척 난해한 작품이다. 위기와 절정 부분이 뚜렷하지 않아 흥미와 긴장감이 떨어지고 내용이 불분명해서 몰입하기 힘들다. 그리고  미완성의 작품은 안개와 어둠에 쌓인 성처럼 실체도 결말도 없이 끝나고 말았다.'


책을 좀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정독을 하며, 행간의 의미를 파악하려 노력했다. 역시 장황한 설명과 느린 사건 전개가 지루했고,내용 사변적이고 상징성이 깊어 의미파악이 쉽지 않았다. 무미건조한 내용은 감정이입이 어렵고, 인물 간의 긴 대화는 어떤 결론도 진전도 없는 논쟁이어서, 마치 언어의 유희처럼 또는  메아리의 울림처럼 공허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같은 특징이 오히려 카프카의 작품을 더 특별하게 만들어 주는 것 같았다.


k가 도착했을 땐 늦은 저녁이었다. 마을은 눈 속에 깊이 묻혀 있었다. 성이 있는 언덕은 안개와 어둠에 잠겨 있어 아무것도 볼 수 없었으며, 어렴풋이나마 큰 성이 있음을 알려주는 불빛도 없었다. k는 오랫동안 큰길에서 마을로 이어지는 나무다리 위에 서서 허공으로 보이는 데를 쳐다보았다.’


첫 문단은 작가의 필력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듯한 어휘 선택은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문맥에서 감지되는 행간의 의미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힘이 주인공의 운명을 결정하리 암시를 주는 듯했다. 깊은 눈, 늦은 저녁, 안개와 어둠,우뚝한 성과 같은 낱말은 무슨 일인가 일어날 것 같은 불안과 두려움을 유발한다.


k는 토지 측량기사로 성 주인인 백작의 요청을 받고 한 마을에 도착한다.  K, 이름도 없이 기호로 불려지는 주인공은 인격으로서 존중받지 못하고  하나의 도구전락한 것처럼 보인다. 이름의 부재는 거대한 세계 속에 뿌리 내리지 못하고 부초처럼 떠도는  비주체적 인간의 실존을 상징하고 있는 다.


그는 첫날 숙소로 잡은 주막에서 마을은 성의 것이기 때문에 성의 허락이 있어야 이곳에서 잘 수 있다는 말을 듣는다.  이곳 주인을 비롯해 모든 마을 사람들은 성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외경심을 갖는다. K는 성이 마을을 지배하는 힘이며 권력의 실체라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

 

 k는 처음 도착한 날부터 줄곧 성에 가려고 애를 쓴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성으로 가는 길은 좀처럼 알 수 없다. 성은 그의 방문을 결코 허락하지 않겠다는 단호함으로 다가가면  더 멀어다. 그가 성으로 가기 위해 먼 길을 갔음에도 거리와 마을의 길은 성의 언덕으로 통하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가면 일부로 그러는 것처럼 휘어지며 성으로부터 떨어지지도, 가까이 가지도 못하게 그를 붙잡아 두는 것이다. 또 자신을 고용한 성의 주인과 연락을 닿을 방법을 강구해 보지만 그마저 번번이 실패한다.


K는 성에서 온 심부름꾼, 성과 관련된 관리나 하인, 심지어 성의 국장 클람의 여자인 프리다에게까지  접근하지만 모든 것이 허사로 돌아간다. k는 면장을 찾아가 자신의 처지를 토로하며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줄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면장은 토지측량사는 필요하지 않다는 문서를 성에 전달했다고 무책임하게 말한다. 그리고 그에게 학교 소사 자리를 제공한다.


애초에 토지측량사란 이 마을에서 불필요한 존재이다. 성 자체가 공개돼 존재할 수 없는 비밀스럽고  은폐된 권력의 실체이기 때문이다. 그곳은 모든 정보가 기록되고, 관리되며, 명령하고 복종하는 관료 중심적 사회로 권위와 관행, 서열을 통해 움직이고 있다. 그래서 무언가를 측정하고 밝히고 파악하는 측량사가 필요할 리 없다. 이런 모순된 상황에서 벽처럼 견고한 지배체제의 불합리와 부조리에 맞서는 인간의 나약함은 허무하고 부질없는 듯 느껴진다.


K는 처음 자신을 부른 성의 무책임함에 대해 항변하며, 합당한 대우를 해주지 않고 모른 척하는 성의 주인이나 관리에 대한 분노와 불만을 표시해 보고, 자신의 권리에 대한 정당성을 요구하며 성의 관리나 또는 클람을 만날 계획을 세우지만, 그럴 때마다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그의 성과의 투쟁은 마치 달걀로 바위치기처럼 무모해 보인다. 그래서인가 후반으로 갈수록 주인공은 마을 사람이나 성과 관련된 사람들이 끝없이 요구하는 체제의 순응과 수동성에 젖어가는 듯 보인다. 프리다와 충동적 사랑에 빠지거나 코냑을 마시는 등 풀어야 할 문제를 외면하고 관능적인 쾌락에 탐닉한다.


성의 관리들이 머무는 헤른 호프는 권력의 힘에 아부하고 빌붙어 생존하는 곳이다. 관리들의 일거수일투족에 민감하며, 그들의 비위를 맞추며 동태를 살피기도 한다. 그곳의 하녀들은 관리들을 열쇠구멍을 통해 염탐한다. 하지만 권력은 은밀해 실체를 파악하기 어렵다. 만약 권력을 엿보거나, 능멸한다면 권력의 횡포와 복수로부터 벗어나기 힘들다.

아말리아 가족은 관리를 모욕했다는 이유로 가족이 잔인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 마을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당하고 불이익을 겪으며 가족은 철저히 소외된다. 작가는 이말리아 가족의 고통을 통해 권력의 횡포와 폭압적 행위를 비판하고 있다.


이 작품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소설 곳곳에 불투명한 사실들이 만연돼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실체도 없이 소문만 무성한 채로 떠도는 유령의 모습처럼 허망하다.


카프카는 이 소설을 집필하던 중 세상을 떠났다. 그가 소설을 완성했다면 어떻게 끝맺었을까  궁금하다. 그러나  결말의 반전은 없었을 것이라 추측된다. 소설의 소재와 주제 자체가 명확한 답을 내놓을 수 없는 삶의 본질적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미완성이 소설의 가치를 더 해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성」은 실재하지 않는 우리 마음속 두려움의 대상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성처럼 우뚝하지만 그것은 외관으로만 판단하는 편견과 왜곡으로 점철된 무수한 허의 상징일 수 있다. 성은 권력일 수도 있지만,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자만심, 위선, 독선과 아집 같은 욕망일 수도 있다. 이런 견고한 생각들이 우리 삶을 지배하고 억압하며, 주체적으로 살지 못하게 만든다.


작가가 ‘성’을 통해 말하고자 한 것은 무엇일까?  그와 아버지와의 관계를 생각해 볼 때 ‘성’은 그의 삶을 억압하는 힘으로 작용하며, 끊임없이 간섭하고 감시하며, 명령하고 종용하는 지배자의 횡포와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모든 가부장적인 권위와 부정부패한 힘들이 성을 견고히 구축하고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을 배척하며 성의 출입을  용납하지 않는 것이라 생각한다.


결국은 어떤 형태로든 인간은 환경과 사회에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그리고 성은 우리 삶을 억압하는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실체를 알 수 없는 것이며, 소설이 결말도 없이 미완성으로 끝난 것처럼 우리 삶 또한 「성」 주위를 수없이 맴돌지만 끝내 들어갈 수 없는 유한한 존재라는 인식을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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