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인티드 베일

by 무지개 경

오랜만에 마음이 찡한 영화를 보았다. 영화의 원작이 서머싯 몸의 소설'인생의 베일'이란 걸 알고, 책을 꼭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타성에 젖어 있던 사랑에 대해 성찰하는 기회가 됐다. 영화는 모든 게 상품화돼 사랑마저 흔하고 가볍게 취급되는 시대에 사랑의 본질이 무엇인지, 고귀하고 진실한 사랑이 어떤 가치가 있는지, 묵직한 화두를 던지며,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 사랑임을 전하고 있다.

귀여운 여인 키티(나오미 왓츠)와 지적이고 냉철한 의사이며 세균학자인 월터 페인(에드워드 노튼)이 영국 런던의 한 사교모임에서 만나 춤을 추고 있다. 키티의 당당함과 아름다움에 반한 월터는 그녀에게 청혼을 한다. 반면 키티는 결혼을 강요하는 어머니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랑 없는 결혼을 한다.

활달하고 사교적인 키티와 진중하고 조용하며, 독서와 연구가 생활의 전부인 월터 사이엔 이렇다 할 공통점이 없다. 사고 방식과 성향도 너무 달라 물과 기름처럼 겉돈다. 부부는 월터의 세균 연구 때문에 중국 상하이로 가게 되고, 새롭고 낯선 곳에 덩그라니 떨어진 부부는 어떤 정서적 교감도 없이 외롭고 적막한 시간을 보낸다. 월터가 일에 열중할수록 키티는 더 외롭다. 서로 보기만 해도 좋아야 할 시기에 부부 사이의 거리감이 심하게 느껴져 보는 내내 답답하고 안타까웠다. 하지만 월터는 키티를 사랑하기에 소원해진 부부 관계를 회복하고자 나름 최선을 다한다.

어느 날 월터는 중국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외로워하는 부인을 위해 함께 파티에 참석한다. 하지만 뜻하지 않은 비극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찌보면 둘 사이의 보이지 않는 갈등은 불의 고리처럼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사랑과 믿음이 형성되지 않은 부부사이란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사상누각과 같은 것. 결국 키티는 파티에서 영국인 외교관을 만나고, 남편과 다른 그의 매력에 빠져든다. 그리고 금단의 선을 넘으며, 그녀를 향한 월터의 깊은 사랑에 큰 상처를 준다.

아내의 불륜을 알게된 월터, 그제야 막연하게 느끼던 그녀의 자신을 향한 거짓된 사랑을 확인하고 한때 그녀를 사랑했던 자신에게 분노한다. 그녀에 대한 실망과 배신감으로 이글거리던 월터의 눈빛이 잊히지 않는다. 월터는 키티와 자신을 향한 복수심으로 콜레라가 창궐한 중국 오지에 갈 것을 결심한다. 그리고 단호하게 말한다. 자신과 함께 가든지 아니면 헤어지자고...

문명의 혜택을 거의 받지 못하고 폐쇄적으로 살아가는 가난하고 무지한 원주민들, 그들의 눈에 비친 이방인은 경계와 위험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콜레라로 위험한 환경에서도 자신의 안위는 개의치 않고 원주민을 치료해 주는 월터를 보고 서서히 마음을 연다. 그러나 오지의 낯선 이들을 위해 혹사하는 그를 보니 왠지 의사로서 사명감보다 자학의 느낌이 더 강했다. 키티에게 받은 상처를 잊기 위해 또는 보상받으려는 듯 일에만 몰두하는 그를 보면서 키티의 마음은 어떨까 상상해 본다. 어쩌다 대화를 하면 눈도 마주치지 않고 경멸하는 말들로 서로의 마음을 할퀴며 고통을 주었다. 한편으론 애증이 있다는 건 미련이 남아 있다는 것, 메마르고 냉냉한 그들의 마음이 봄눈처럼 녹아내리길 바랐다.

월터의 이타적 사랑은 이기적이던 키티의 세계관에 큰 영향을 준다. 그녀는 수녀원에서 처음으로 누군가를 위한 봉사를 하면서 순수하고 고귀한 사랑의 가치를 깨닫게 된다. 또한 열정적이고 진실한 월터의 참 모습에 새로운 매력을 느낀다. 월터도 아이들을 위해 피아노를 치는 키티의 달라진 모습을 애정어린 눈빛으로 바라본다. 이제야 서로의 본 모습을 인정하고 깊은 마음으로 이해하게 된 부부는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사랑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사랑의 결과인 아이를 갖게 되지만, 월터의 아이가 아님이 암시적으로 드러난다. 하지만 그것이 그들의 사랑에 문제가 되지 않았다. 험난하고 열악한 환경 속에 던져진 인간은 모진 고난과 역경을 극복할 때 더욱 성숙한 인간으로서 삶에 대한 통찰과 혜안을 얻게 되나 보다.

서로가 막 사랑을 시작했는데, 행복은 너무 짧았다. 그래서 그 사랑이 더욱 애절하고 가슴 시리다. 월터는 결국 콜레라로 사망하고 키티는 영국으로 돌아간다. 시간이 흐른 후 아이와 함께 걷는 그녀를 보았다. 키티는 이미 예전의 나약한 여인이 아니었다.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강하고 성숙한 여인이자 엄마였다.

슬프지만 아름답고 감동적인 영화였다. 문학적 감수성과 역사적 리얼리티와 휴머니즘이 잘 어우러진 영화라 생각했다. 남녀의 보편적 사랑을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확대하고 승화시키며 무한한 사랑의 본질을 사유케 한다. 인상적이었던 장면 중 하나는 중국 오지의 원주민들의 비참한 삶과 무관한 듯 유유히 흐르는 아름다운 강과 푸른 자연 풍경이었다. 그 대조적인 모습을 보며 생의 아이러니를 느낀다. '인생의 베일'이란 원작의 제목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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