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속 깊이 파고드는 냉기로 따뜻함이 그리웠던 어느 날 우연히 보게 된 영화, 처음엔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약간의 초조함와 긴장감에 마음 한편이 서늘했다. 하지만 남자 주인공으로 조슈 브롤린(탈옥수 프랭크 역)이 등장하자 험악한 일은 일어나지 않으리란 안도감이 들었다. 항상 선입견을 배제하려 애쓰지만 배우의 평소 이미지나 그가 맡았던 역할, 주연급 배우라는 타이틀은 알게 모르게 배우에 대한 믿음을 심어주곤 한다. 직관적으로 그가 악당일리 없으며, 여자 주인공인 케이트 윈슬렛(아델 역)과 모종의 썸이 이뤄질 거란 추측을 가능케 만들었다. 어떤 로맨스의 향이 풍겨오자 서늘한 기운이 가시면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영화의 제목은 노동절에 일어난 일임을 상기시키지만, 어떤 특별한 날과 상관없이 겨울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겨울은 소외되고 외로운 사람들에게 더 춥고 황량한 계절이다. 영화 속 주인공들의 삶이 그러했다. 연인에게 버림받고, 깊은 상처를 지닌 채 겨울처럼 메마르고 황폐한 삶을 무의미하게 견디는 사람들.
살인죄로 복역중인 프랭크는 맹장수술을 받은 후, 그 틈을 이용해 탈옥한다. 그는 수시로 어떤 기억에 시달리는데, 과거의 기억을 통해 왜 그가 죄를 짓게 됐는지 드러난다. 외도를 한 부인과 말다툼 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고로 여자는 죽고, 아기마저 욕조에 빠진다. 이 장면은 그의 꿈을 통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데, 죄책감으로 고통 받는 그의 정신적 혼란과 내면의 상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하는 장면을 보니, 비록 살인은 했지만 순간적 실수이며, 그가 극악무도한 인간은 아니라는 것, 그도 상처받은 인간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한편 남편과 이혼 후 홀로 아들 헨리를 키우며 살아가는 아델은 여러 번의 유산과 남편의 외도로 심한 충격을 받고, 대인기피증을 앓고 있었으며, 그로 인해 스스로 자신을 가둔 채 은둔 생활을 하고 있었다. 아무 희망도 없이 무기력에 빠져 살림을 놓아버린 엄마를 위해 13살 사춘기 소년 헨리는 아들의 역할뿐만 아니라 부재한 아빠의 몫까지 하려고 애쓴다. 어른들 때문에 나이에 맞지 않은 의무감이란 무거운 옷을 입었지만, 소년 특유의 호기심과 순수함을 잃지 않고 꿋꿋하게 견디는 소년의 모습이 기특하고 사랑스러웠다. 영화는 조이스 메이너드의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각색을 해서인지 문학적 감수성과 예술적 영상이 돋보였다. 소년이 성장기에 느끼는 성에 대한 호기심과 정체성의 혼란, 어른들을 바라보는 시선 등이 무척 섬세하게 그려졌다.
아들에게 심부름을 시키고 아델 자신은 거의 가지 않던 마트를 모처럼 가게 된 날, 우연찮게, 아니 숙명이랄 수도 있는 만남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탈옥수라는 두려운 인물 설정과 협박이라는 과격한 내용에도 불구하고 분위기는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사람마다 느낌이 다르겠지만, 나는 오히려 온화하고 조용한 가운데 별다른 저항 없이 너무도 침착하게 대응하는 모자의 행동이 약간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아무튼 처음 헨리에게 접근한 프랭크는 누구와 같이 왔는지 확인하고 아이를 앞세워 아델에게 도와줄 것을 요구한다. 옷에 피가 묻어 있고, 어딘지 불안해 보이는 그를 경계하고 거절하는 아델, 그러자 헨리를 붙들고 은근히 위협한다. 어쩔 수 없이 아델은 프랭크를 집으로 데려온다.
그가 집에 온 후로 뜻하지 않은 일들이 벌어진다. 손재주가 좋은 프랭크는 집안 구석구석 고장난 것들을 고치고, 자동차 타이어도 갈아주고 헨리에게 야구도 가르쳐 주는 등 아버지와 남편에게 받지 못한 것들을 그득 채워준다. 또 음식은 어찌 그리 잘 만드는지 완전 다재다능하고 게다가 잘 생기기까지 한 그에게 아델과 헨리는 점점 빠져든다. 그가 나쁜 사람이 아니란 믿음이 생기면서 그를 가족으로 받아들인다. 결국 아델은 그와 캐나다로 도망갈 계획까지 세우게 되는데ᆢ
위기의 순간에 일이 순조롭게 풀리면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반전에 또 반전, 죄는 달게 받아야 하고, 사랑은 당장 이루어질 수 없는 법이다. 마지막 감동을 선물 받기 위해 현재의 아쉬움과 안타까움쯤이야 견뎌야지.
프랭크가 떠나고 다시 찾아 온 고독과 외로움, 잠깐의 행복으로 들떴던 집안의 활기도 시라지고, 아델은 또다시 은둔자가 된다. 그에게 쓴 수많은 편지가 되돌아 오고, 그가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지만, 그녀는 망부석이 돼 그집을 떠나지 않는다. 프랭크 사건 이후 헨리는 친아빠에게 맡겨진다. 비록 아빠에게 둘아갔지만 헨리의 마음 속에는 늘 프랭크가 있었다.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기인 청소년기에 그와 함께 한 경험은 짧지만 강렬하게 남아 헨리의 인생에 큰 영향을 주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청년이 된 헨리는 사랑도 하고, 프랭크가 가르쳐 준 대로 타이어도 갈고, 복숭아 파이도 민들고ᆢ
드디어 프랭크에게 연락이 왔다. 아델이 아닌 헨리에게. 혹시 아델이 혼자가 아니라면 큰 실수를 하는 거라 생각하고 조심스럽게 헨리에게 먼저 물어보는 그의 자상함과 배려심, 그는 더욱 사려 깊고 성숙한 사람이 돼 나타났다. 그리고 아델이 자신을 기다렸다는 사실을 알고 뜨겁게 포옹한다. 아! 정말 이 장면에선 가슴이 뭉클해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긴 시간을 돌고 돌아 비로소 하나가 된 그들의 낭만적인 해후, 비록 시간이 그들의 모습을 바꿔놓았지만, 서로의 눈엔 가장 아름답고 멋진 연인일 것이다. 역시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어주고 새로운 희망을 부여한다. 추운 겨울에 마음이 훈훈해지는 영화를 보고, 따끈한 차까지 마시니 더이상 춥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