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정조와 화성 융릉
정조의 일생은 모진 수난의 연속이었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는 모습을 보았고 천신만고 끝에 왕이 된 후로도 당쟁의 풍파 속에서 끊임없는 암살과 역모, 왕대비(정순왕후)의 간섭 등으로 왕의 자리는 언제나 위태로웠다.
‘아, 불효한 아들이 천지에 사무치는 원한을 안고 지금껏 모질게 살았던 것은 소자에게 중요한 일을 맡겼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심정이 잘 드러나는 구절이다. 저자 박영규의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그가 왕위에 오르자 11세 이후 줄곧 가슴앓이로만 간직했던 아버지에 대한 복수를 감행하는 한편 파당을 배격하고 새로운 인물을 대거 등용해 친위세력을 형성해 나갔다고 돼 있다. 하지만 그가 믿었던 최측근 홍국영이 모든 실권을 장악하고 세도정치를 함으로써 쓰라린 배신을 경험하게 된다.
정조는 다양한 개혁을 시도하였다. 문예부흥을 통해 새로운 정치를 구현하려 규장각을 만들고, 서얼과 실학자와 같은 진보 세력과 함께 기득권 세력에 대항했다. 정조의 규장각 중심의 정치는 영조의 탕평책을 계승하고 있었고, 이로 인해 당쟁은 시파와 벽파의 갈등이라는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된다.
정조가 남인 계열의 실학파와 노론에 기반을 둔 북학파의 장점을 수용하여 정국을 이끌어 나가자 조정은 정조의 이념에 찬성하는 시파 중심으로 운영되었고 이에 위기를 느낀 벽파는 더 똘똘 뭉치게 되었다. 그러던 중 1791에 일어난 신해박해를 기점으로 천주교 수용 불가 결정이 나면서 벽파는 다시 세력을 잡게 되었고 정약용을 비롯한 남인 계열의 실학자들이 축출되면서 정조의 세력이 위축되었고 1800년 정조가 승하하자 그의 24년의 문화정치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런데 정조가 인간적으로 큰 슬픔을 겪게 되는 것은 아버지의 죽음뿐만이 아니었다. 정조는 자식이 없다가 늦둥이를 얻게 돼 세상을 다 가진 듯 기뻐하였다. 그러나 전국에 홍역이 돌았고 세자도 홍역을 앓게 된다. 정조의 정성으로 세자의 병은 완치되었지만 며칠 후 세자는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그리고 세자의 어머니 의빈성씨도 넉 달 후 갑자기 사망한다.
정조는 예사롭지 않는 왕실의 비극의 근원을 찾아 나선다. 지관을 대동하고 사도세자의 묘를 찾았다. 지금의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 삼육의료원 터이다. 이곳은 주변 경치와는 달리 무덤의 터로는 좋지 않았다. 당시 그 터에 뱀이 꼬이고 중랑천 물소리가 심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곳이 흉지임을 알게 된 정조는 우여곡절 끝에 지금의 화성 융릉자리로 사도세자의 묘를 옮긴다. 그 후 바라던 후사를 얻는데 그가 훗날의 순조이다.
고풍스러운 적송과 산새소리 아름다운 융릉은 그렇게 탄생하였다. 왕릉과 그 뒤 만들어진 숲 속 길은 외국인들에게 ‘조선의 풍수와 정원’의 진수를 보여주기 손색이 없고, 그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문화유산에도 등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