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으로

05 역사의 그늘 '문화 대혁명'

by 무지개 경

마오쩌둥 주도로 추진된 ‘대약진 운동’은' 문화 대혁명'의 도화선이 된다. 대약진 운동은 1958~60년 초에 일어난 노동력 집중화를 통한 경제성장 정책이다.

마오쩌둥은 ‘생산의 새로운 고조를 일으키자’는 슬로건을 내걸고 철강 등 노동력 집중 산업 부흥을 독려하는 경제부흥운동을 추진한다.

선진국을 따라잡겠다는 목표를 설정하고 공업생산 지표를 크게 높였다. 이를 위해 농촌에서 인력을 강제로 동원해 도시로 유입시켰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농촌의 생산력이 급속히 저하되고, 인구가 급격히 늘어난 도시는 생필품이 부족하게 되었다.


연이은 자연재해로 흉작이 겹치고 옛 소련과의 관계까지 악화되면서 수 천 만 명의 아사자가 생겼다. 결국 기술 개발은 병행하지 않고 노동 집중만으로 무리하게 추진한 중공업 진흥은 기대에 못 미치고 대약진운동은 실패로 끝났다.

3년여에 걸쳐 일어난 대약진운동은 중국을 발전시키기보다는 농ㆍ경공업의 퇴보와 중화학의 과대 발전이라는 기형적 결과를 가져왔다. 결국 마오쩌둥은 대약진운동 실패의 책임을 지고 국가주석에서 물러난다.


대약진운동 실패 후 중국공산당 내부에서는 노선 갈등이 심화된다. 최고지도자 마오쩌둥은 사회주의 대중노선을 주도하고, 류샤오치와 덩샤오핑을 선두로 한 실용주의자들은 공업 및 분야별 전문가를 우선으로 할 것을 주장했다.

민생경제 회복을 위해 일부 자본주의 정책을 채택한 정책이 실효를 거두면서 실용 주의자들이 실제로 부상하자 이에 위기를 느낀 마오쩌둥은 부르주아 세력과 자본주의 타파를 외치면서 이를 위해 청년이 나서야 한다고 선동했다.

그는 1962년 9월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계급투쟁을 강조하고, 사회주의에 자본주의를 접목한 수정주의를 비판하면서 반대파를 무차별 공격했다. 마오쩌둥의 지시로 학생을 주축으로 한 홍위병이 결성돼 전국을 휩쓸며 마오쩌둥의 반대파들을 비판대에 세웠다.

1966년 8월 8일 중앙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마오쩌둥이 ‘프롤레타리아 문화혁명에 관한 결정 안 16개조’를 발표함으로써 10년에 걸친 문화대혁명이 본격화된다.


홍위병들은 전국에서 마오쩌둥 사상을 찬양하고 전통적 유교문화를 거부하는 시위를 벌인다. 학교를 폐쇄하고 당 관료들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실용파들이 장악한 권력을 무력으로 탈취했다.

문화대혁명으로 실각되거나 숙청된 숫자는 300만 명에 달한다. 문화대혁명은 마오쩌둥의 절대적 권력이 확립되면서 절정에 달한다. 하지만 마오쩌둥에게 충성한 군부 지도자들이 대거 숙청되면서 인민 사이에서 문화대혁명이 마오쩌둥 개인의 권력욕을 위한 것이 아닌지 의구심이 생겨났다.


1973년 덩샤오핑이 권력에 복귀하면서 문화대혁명은 곳곳에서 공격을 받기 시작했다. 결국 1976년 9월 마오쩌둥이 사망하면서 문화대혁명도 막을 내린다. 문화대혁명은 한 마디로 중국 역사를 후퇴시킨 ‘극좌사회주의 운동’이다. 문화대혁명으로 움트려던 자본주의의 싹이 짓밟히고, 인권은 무참히 유린됐다. 중국의 전통적인 유교문화가 붕괴되고, 민중의 삶은 피폐해졌다. 문화대혁명은 권력투쟁과 개인숭배가 낳은 중국의 아픈 과거이다.

출처; 생글생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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