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에서 조금 멀리
내게는 오랫동안 함께 해온 소중한 사람들이 있다. 1~2년에 한두 번쯤 경조사 때 겨우 만나는 게 전부이지만, 늘 고마운 사람들이다. 1999년 여고 2학년 시절, 이과와 문과로 나뉜 첫해에 같은 반으로 만난 친구들이라 나를 제외한 9명은 모두 인문계열 대학교로 진학했고 나 혼자 예체능 전공자여서 생각도 다르고 환경도 달랐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하게 되면 연락이 시들해질 거라 생각했었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질 테니까 여느 다른 모임처럼 우리도 얼마 지나지 않아 멀어지게 될 것 같았다.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니까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적을 테니까. 하지만 끈적한 절친함을 나누던 그 어떤 친구들보다 자주 연락하며 지내고, 여전히 서로를 배려한다. 내게는 생각만 해도 따듯함이 벅차오르는 9명의 친구들이 있다.
H여고 2학년 9반 친구들 10명으로 이루어진 우리들은 모두가 끈끈한 사이는 아니다. A는 B와 절친이고, C는 D, F, E와 더욱 친하다. A와 F는 데면데면하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적당한 친근감을 가지고 있다. 우리 모임은 그 시절 담임선생님께서도 함께 하신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선생님과 재회한 건 몇 년 전 아드님 결혼식에 다녀오면서 부터이다. 주변을 잘 챙기는 반장은 아직도 여전히 담임선생님과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다. 때마침 시간이 맞는 몇몇 친구들과 마을 축제를 즐기듯 선생님의 좋은 날을 축하하는 마음으로 일면식 없는 분의 결혼을 축하드렸다.
선생님께서도 기분이 좋으셨는지 볼펜을 꺼내어 명함 뒷면에 ‘스케일링 10% 할인’이라고 적어주셨다. 그날 결혼하신 아드님께서 운영하는 치과의 할인 쿠폰인 셈이다. 지금은 의료보험이 적용되어 스케일링 비용이 많이 저렴해졌지만, 그 시절엔 최소 5만 원쯤 되었기에 나름 유용한 쿠폰이었다. 생활반경이 달라서 그 쿠폰을 사용하진 않았지만 '지인찬스'를 선물 받는 즐거운 경험이었다.
10명 모두가 담임선생님과 함께한 소중한 기억이 있다기보다는 그 시절 우리가 함께한 시간을 특별하게 여긴다는 것, 그것이 우리의 관계를 지속할 수 있었던 힘이 아니었을까. 올해도 어김없이 스승의 날을 맞이하여 선생님께 드릴 선물을 의논했다. 요즘 유행하는 셀프 마사지 기계를 골랐고, 총무가 선물을 챙겨 보내드렸다. 그리고 선생님께서도 감사의 인사를 전해주셨다.
"총무 00이 아기는 잘 크고?"
“미술 하는 00이는 아직 시집 안 갔나?”
선생님께서 우리에게 전한 인사는 이게 다였다고 한다. 나머지 친구들은 ‘이하 생략’이라며 깔깔대며 우리끼리 안부를 주고받았다. 특히 요즘 같은 시기에는 카카오톡 대화창에서만 이따금씩 연락하는 사이지만, 그래도 섭섭하거나 어색하지 않은 우리. 그래서 더욱 고마운 친구들이다.
요즘은 여유 시간이 많은데 마음이 고요하지가 않다. 무엇에도 집중하기가 어렵다는 핑계로 드라마를 즐겨본다. 장나라와 고준이 열연하는 Tvn의 드라마 ‘오 마이 베이비’는 노처녀의 로맨스라고 단정 짓고 웃어넘기기엔 나름의 깊이가 있다.
40대 전 후, 내 나이 또래의 미혼 여성이 조연이 아닌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드라마는 흔치 않다. 보통 40대의 여배우는 불륜이거나 이혼녀, 아이 둘 셋을 낳은 워킹 맘이거나 전업 맘이거나. 하나같이 ‘결혼'과 가까이에 있는 사람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오 마이 베이비'는 조금 다르다. 오랜 사회생활으로 능력치는 쌓였지만, 여전히 싱글인 40대를 바라보는 여성의 캐릭터를 현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아이를 갖고 싶은 마음으로 '정자 기증'에 관심 갖는 것, 이혼 후 홀로 아이를 키우는 남사친과 한 집에 사는 것, ‘이모’라고 부르는 20대 남자 직원 등 드라마다운 설정이 더해져 비슷한 또래 여성인 나와 100% 일치하진 않지만, 장나라(극 중 장하리)와 나는 비슷한 부분이 많다.
장하리는 육아 잡지 15년 차 기자이다. 겉으로 보기에 부족함이 없는데 여전히 혼자다. 우연히 방문한 병원에서 건강상 아이를 가질 수 있는 시기가 얼마 남지 않음을 알게 되었고, 서둘러 소개팅을 했지만 괜찮은 사람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결혼이 어려우니 건강한 정자를 기증 받아 싱글 맘으로 살면 어떨까 상상하다가 불법 정자 매매 미수 사건에 얽히게 되었다.
‘육아지 담당자로서 어떻게 그럴 수 있었나. 너무나 불쾌하다. 차라리 개를 키워라.’
'15년 동안 여러 엄마들 만나서 엄마들 마음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근데 정말 잘 알지 못한 게 맞았어요. 엄마들 마음 저도 알고 싶고 이해하고 싶어요. 엄마가 될 수 있는 기회가 허락됐으면 좋겠네요.'
잡지사의 주요 행사에 보이콧하며 독설하는 서포터즈맘들에게 진실된 사과를 건네는 장하리의 마음이 느껴져 울컥 눈물이 흘렀다. 미혼인 나는 정자 기증을 받으면서까지 아이를 갖고 싶은 노처녀 장하리의 마음에 공감했는데, 엄마들은 그렇지 않은가 보다. 아이 엄마인 친구들이 아직도 혼자인 나를 이해할 수 없듯이 나 역시 그들의 전부를 이해할 수는 없는 거였다.
내 나이 또래의 독신 여성이 느끼는 허탈함과 무기력이 담긴 너무나 현실적인 에피소드여서 드라마에 불과한데 과하게 몰입해버렸다. 극중 장하리는 골드 미스로 아이를 너무 갖고 싶은 마음에 엉뚱한 상황을 만들어버렸다. 정상적이지 않은 주인공의 선택 덕분에 주변사람들의 시선을 받게 되었지만, 누가 누구를 정상이 아니라고 비난할 수 있을까. 모두와 같은 삶을 살지 않는다고 해서 정상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물론 드라마 속 주인공 장하리는 세 명의 남자 중 한 명과 이어져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로 끝날 것 같지만, 현실은 다르다. 나는 결혼할 수 있을까. 아이는 낳을 수 있을까. 남들처럼 정상적이고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이성 관계 뿐 아니라 친구 사이도, 사회 속 관계 맺음도 서툰 나여서 결혼이 늦을 거라 예상하긴 했지만, 이렇게 늦어질 줄은 몰랐다. 애초에 비혼을 마음먹었다면 아쉽지라도 않지. 그렇다고 해서 지금 삶이 만족스럽지 않은 건 아니다. 대체로 편안하다. 하지만 모두와 같지 않은 이 상태가 정상처럼 느껴지지는 않는다. 끝이 보이지 않는다. 무한 쳇바퀴 돌고 있는 기분이 든다.
나만 빼고 다른 모든 사람들이 정상적으로 살고 있는 것만 같은 요즘, 9명의 친구들은 아직도 여전히 나를 격려하고 위로한다. 우리는 자주 만나는 것도 아니고, 굉장한 추억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서로를 100%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하지만, 이따금씩 나누는 대화에도 서로 배려하고 있음을 느낀다.
‘더 좋은 사람 만날 거야’
‘아직 인연을 만나지 못한 걸 거야.’
같은 위로를 하지 않아도 괜찮다. 혼자가 어때서. 다만 이렇게 혼자 늙게 되더라도 오랫동안 안부를 주고받을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사실에 감사할 뿐이다. 조금 다른 모습일지라도 감싸주는 마음이 큰 친구들 덕분에 나도 좋은 인연을 이어갈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들이 마음을 연 만큼 내 마음도 활짝 열어두어야겠지. 같이 살 남자는 없지만, 오랫동안 좋은 사이로 지낼 친구는 있다. 뭐가 더 필요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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