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세상 읽기

여행을 기록하다

다시 떠날 수 있을까

by 아무

1998년 xx월

집 앞 횡단보도를 건너면 한성여객 15번 버스 차고지가 있다. 출발점이자 종점이라서 늘 앉아서 이동할 수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다른 버스에 비해 배차간격이 짧아서 기다리는 시간도 길지 않았던 것 같다. 15번 버스는 순환형 노선으로 어느 방향으로 출발한 버스든 다시 이곳으로 돌아온다. 호기심 많은 어린 시절의 나는 15번 버스가 어느 곳을 돌고 돌아 다시 이곳으로 오는지 궁금했고, 어느 날 문득 실행에 옮겼다.


어릴 적부터 맞벌이로 생계를 꾸려온 부모님 덕에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혼자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게 익숙했다. 초등학교 2학년 즈음부터 혼자 버스를 타고 다녀서 지나온 길과 내릴 곳의 역명, 가야 할 곳의 위치를 기억하고 찾아가는 건 어렵지 않았다. 버스 정면에 쓰여 있는 동네 이름이 다소 생소해서 겁도 났지만, 버스에서 내리지 않는 한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테니 길을 잃을 위험도 없었다.


버스를 타자마자 바로 왼쪽 맨 앞자리, 출입구 쪽 첫자리를 좋아한다. 운전기사님의 시선과 호흡을 함께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앞이 훤히 잘 보여 도로 상황도 알 수 있는 그곳에 앉아 나만의 버스 여행을 시작했다. 일단 내게 익숙한 노원 방향의 버스를 탔다. 버스는 동일로를 따라 중계, 노원, 상계동과 마들역을 지나갔다. 마들역은 상계동 이모네에 가는 길이라 아는 길이었고, 이제부터는 처음 경험하는 낯선 곳이다. 버스는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계속 나아갔다. 아파트 단지를 지나 키 작은 낮은 건물과 시장, 사람들을 구경했다. 무모한 도전이었나 싶다가 도로 표지판을 보면서 ‘이곳이 어디쯤이겠구나.’, ‘어느 곳과 이어져 있겠구나.’ 같은 생각을 하니 재미있었다. 시내쯤 다다르니 길이 꽉 막혔다. 버스가 서 있는 시간이 길어지고 나른한 오후 햇살이 더해져 졸음이 몰려왔다.


한참 졸다가 내려야 할 곳을 지나친 건 아닌지 걱정이 될 즈음 익숙한 아파트 숲이 보였고 잠시 후 우리 동네에 도착했다. 한 바퀴를 도는 데 두세 시간쯤 걸린 것 같다. 엄청나게 재미있지 않았지만, 아무도 모르는 비밀스러운 여행을 다녀왔다는 사실이 좋았다. 누군가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던 나만의 버스 여행을 그 후로도 한두 번 더 즐겼던 것 같다. 언제든 떠나고 싶을 때 15번 버스에 올라탔고 창문 밖 사람들과 거리를 구경했다. 대학에 입학하던 해에 이사를 했고, 15번 버스와 함께한 추억은 잊혀져 갔다.




2003년 여름과 겨울 사이

낮동안 학교 생활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 늦은 밤 컴퓨터 앞에서 다시 모였다. 네이트온이나 MSN 같은 메신저 채팅이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밤새도록 마음 맞는 선후배, 친구들과 수다를 떨었다.

“우리 내일 여행 갈래?"

“그래 좋아!"

유난히 잘 통하는 친구와 여행 이야기를 하다가 몇 시간 후, 다음날 아침,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만났다. 20대 초반의 우리들은 낯선 곳에서 하룻밤 잠을 잘 만큼 베짱이 두둑하진 못해서 당일치기 또는 무박 3일 같은 여행을 즐겼다. 맛집을 찾아가지도 유명한 곳을 돌아다니지도 않았지만, 아무 곳이나 떠날 수 있는 즐거움으로 행복했다. '막 여행'이라는 모임명도 만들었고, 춘천, 강릉, 부산, 천안 등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 때마다 모였다.


돌이켜보면 긍정 에너지와 추진력이 가득한 그 친구 덕에 가능했던 일이다. 나 혼자서는 절대 불가능했다. 아직도 가장 친한 친구인 그녀는 이미 십 수 년 전 결혼을 했다. 결혼 전 시골집에서 보낸 1박 2일이 우리가 함께한 마지막 여행이었다. 이제 더 이상 막 여행을 즐기지 못하지만, 언젠가 먼 훗날 어디든 함께 떠날 수 있기를 바라본다.




2007년 08월

잠든 도시의 그림자. 아쿼틴트. 2008.

취업한 지 3년이 되던 해 여름, 퇴사를 결심했다. 애매하고 어정쩡한 나이와 경력이 생겼지만, 변화가 필요했다. 여기 말고 다른 곳이라면 어디든 좋았다. 그중 가장 궁금한 곳, 동경의 대상인 뉴욕행 비행기 표를 구입한 후 정보를 모았다.


뉴욕을 여행지로 택한 건 ‘디자인 아방가르드 허브 루발린(디자인하우스, 2004)’덕분이었다. 천재적인 타이포그래피 디자이너 허브 루발린의 감각을 느끼고 싶었고, 그가 졸업한 쿠퍼 유니언 대학에 가고 싶었다. 허브 루발린의 타이포그래피를 직접 보고 싶었다. 폴 오스터의 뉴욕 3부작(열린 책들, 2003), 한 젊은 예술가의 뉴욕 이야기, 뉴요커(마음산책, 2004),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민음사, 2006) 등 뉴욕과 관련된 몇 권의 책을 읽었다.


쿠퍼 유니언은 예술과 건축 관련한 전문적인 교육이 이루어지는 우리나라의 한예종처럼 특별한 교육을 하는 명문 공립대학으로, 전액 장학금 지원하는 대학으로도 알려져 있다. (2014년부터 반액 장학금으로 바뀌었다.) 그런 수재들이 다니는 학교를 나처럼 평범한 사람이 욕심낼 순 없겠지만, 허브 루발린이 다닌 캠퍼스를 구경하며 창의적인 사람들의 기운을 느끼고 싶었다.


평소 즐겨 찾던 남산도서관에서 뉴욕 여행을 준비했다. 집 근처에도 도서관이 있지만, 일부러 산꼭대기에 있는 낡고 오래된 그곳을 찾아갔다. 명동역이나 남대문 역에 내린 후 마을버스를 갈아타거나 굽이굽이 골목길을 돌아 계단을 오르고 언덕을 넘어가야 도착하는 곳, 가는 길이 쉽지 않지만, 힘겹게 도착한 만큼 남산의 기운을 나눠 받는 기분이 들어 좋았다.


남산도서관은 남산도서관 마니아들이 지키고 있다. 혈기왕성한 중고생은 거의 없고, 몇 주 전에 방문했을 때에도 본 것 같은 익숙하고 차분한 인상의 사람들이 신문을 보거나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한다. 한 번 갈 때마다 5권의 책을 빌렸고, 2주간의 대출 기간이 끝나기 전에 다시 찾았다. 남산도서관이 가진 수수한 매력이 좋았다.


맨해튼 이스트 빌리지에 위치한 쿠퍼 유니언은 보통 대학교처럼 캠퍼스가 형성되어있지 않으며, 학과마다 이용할 수 있는 강의실(건물)이 이스트 빌리지 곳곳에 있다. Cooper st. 주변을 걸으면서 ‘내가 이곳에 다닌다면 얼마나 좋을까, 다시 오고 싶다.’ 같은 생각을 하며, 근처 Strand Book Store로 가서 책 구경을 했다.


뉴욕에서 보낸 한 달간의 시간도 좋았지만, 여행을 준비하며 남산도서관에 찾아다녔던 즐거움도 좋았다. 도서관을 향하는 것 자체가 여행이었다.




2009년 08월

1. '동해-삼척' 가장 빠른 길 2. 내가 걸어간 길

왜 목적지를 동해로 선택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어지럽고 복잡하던 그때의 나를 붙잡으려면 무언가 변화가 필요했다. 일과를 마친 어느 금요일 오후, 고속버스를 타고 무작정 동해로 향했다. 근처 찜질방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토요일 아침 무렵 묵호항으로 갔다.


묵호항에서부터 진짜 여행이 시작되었다. 마음 같아서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싶었지만, 경제적인 상황도 시간적 여유도 없으니까 동해에서 시작해서 남쪽으로 걸었다. 하염없이 동해안 둘레길을 걷고 싶었다. 더웠고, 다리도 아팠고, 인적 드문 외딴곳에 홀로 있으니 무서웠지만, 그저 걷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지도 하나 없이 알지 못하는 길을 걷다 보니 5분 정도면 갈 거리를 이리저리 헤매다 30분이나 더 걸렸다는 것을 막힌 길을 돌아가면서 알아챘다. 그렇게 해안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걷다가 자동차 전용도로를 만났다. 그 길 따라 걷는 건 더 이상 불가능해 보였고, 근처 시외버스 정류장을 찾아가 남쪽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동해 묵호항-동해 시내-동해항-삼척-삼척 시내-맹방리-임원-호산-무구-울진-영덕-포항까지. 포항에 도착해서 경주로 가는 버스를 탔다. 경주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서울로 향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외롭고 무모한 여행이지만, 그런 시간이 그 시절 내게 필요했다.




2016년 02월

철학의 길. 교토. 2016

독일 하이델베르크에 있는 철학자의 길과 어떤 점이 비슷하고 어떤 점이 다른지 궁금한 일본 교토의 철학의 길.
벚꽃길로 유명하지만, 아직 벚꽃이 피지 않은 2월이라 앙상한 나무들이 나를 반긴다. 겨울의 교토는 분지 특유의 차가운 날씨 덕분에 바람이 셌다. 다른 계절보다 볼거리가 적어서인지 관광객도 많지 않아 사색을 즐기기에 딱 좋았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멍하게 있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좋아할 것 같다. 주황색 자전거를 타며 교토 시내를 오르락내리락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요즘은 고즈넉한 시골에서 자연의 기운을 온몸으로 느끼며 살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도시 가까이에 살아야 먹고살기가 가능할 텐데. 역시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어야 다른 것들을 할 수 있으니, 역시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 그것이 문제로구나.




2018년 07월

손에 닿을 듯 말 듯, 내 것인 듯 아닌 듯, 마지막 여행을 언제 다녀왔던가. 최근 세미나 때문에 2박 3일로 부산에 다녀왔는데, 그것도 여행이라고 할 수 있는 건지. 지금의 직업으로 살게 된 후부터 일주일 이상 쉬어본 기억이 없다. 설날이나 추석을 포함한 연휴가 있긴 했지만, 그 시기에 바다 건너 멀리 떠난다는 건 경제적으로 심리적으로도 넉넉하지 못해 도전하기 어려웠다.


어릴 적엔 몰라서 여행을 즐기지 못했다. 남들 다 가는 곳, 일본이나 동남아를 다녔다. 휴일이 비교적 넉넉하던 시절엔 돈이 없어서 여행을 가지 못했다. ‘그 돈이면..’ 같은 핑계가 발목을 잡았다. 최근엔 내 집 소파 위에 누워 책 보는 게 행복해서 여행을 가고 싶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지금은 시간과 체력, 의지가 없다.

문득 내 현실을 자각하고 나니, 나는 멀리 오래 떠날 수 없는 사람이었다.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는 걸 알고 나니 여행에 대한 갈망이 커졌다. 어디로든 훌쩍 떠나고 싶어 국내 여기저기 1박 2일, 혹은 2박 3일로 꾸준히 집 밖을 탐험하고 있지만 갖지 못한 긴 휴가에 대한 갈망, 비행기를 타고 바다 건너로 훌쩍 떠나고 싶다는 바람을 늘 간직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살아오면서 마음 편히 여행 다녀온 기억이 거의 없다. 알지 못해서, 돈이 없어서, 시간이 없어서, 필요하지 않아서 늘 적당한 신비로움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언제쯤 만족스러운 여행을 할 수 있을까.




2019년 05월

아침에 바르는 영양크림이 벌써 밑바닥을 보이고 있다. 수년 전 화장품에 대한 관심이 클 때 알게 된 바비 브라운의 크림을 4통째 쓰고 있다. 새로운 제품을 알아보고 고르는 즐거움보다 만족스러운 하나를 꾸준하게 즐기는 편이다. 크림 하나에 15만 원으로 다소 비싼 가격이지만, 건조한 나의 피부를 이만큼 기름이 진 촉촉함을 선사하는 제품이 없었다. 적절한 대체품을 찾을 기력도 없으니 충성고객이 되었다. 시중에서 구매하려면 15만 원쯤 하는데 면세점에서는 9만 원 정도에 구입 가능하다. 언젠가부터 여행을 즐기지 않는 삶을 살게 되었지만, 재작년부터 이 크림을 새로 사야 할 시기에 맞춰 여행을 다녀오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정도의 사치는 누려도 될 것 같았다. 벌써 5월이라 올해 주어진 나의 여름휴가 기간에 맞춰 떠날 계획을 세우기엔 이미 늦은 시기지만, 내 여행의 목적은 화장품 사기이니까 이 정도의 새 루틴을 하나 추가한다. 이번엔 어딜 가야 할까? 어딜 갈 수 있을까? 누구와 갈 수 있을까?




2020년 07월

오랜만에 마트에 들러 잡곡과 누룽지, 국물용 멸치, 고무장갑을 사 왔다. 오랜만에 잡곡밥을 하기 위해 쌀을 불려두었고, 국물용 멸치의 머리와 똥을 따고, 말려둔 파뿌리와 다시마, 방금 딴 멸치 대가리를 넣어 육수를 만들었다. 이걸로 멸치국수를 해 먹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즐거워졌다. 풍미를 위해 살짝 덖은 멸치를 보고 있으니 문득 히레사케가 생각났고, 냉장고에 있는 사케를 꺼냈다. 전자레인지로 데운 사케에 덖은 멸치 하나를 넣으니 딱 히레사케 맛이 났다.

맨날 하는 집안일이 뭐 그리 즐겁겠나 싶지만, 정말 재미있다. 빨래도 청소도 좋다. 소소한 일상으로 하루를 마무리하고 텔레비전을 켜고 소파에 앉아 누룽지를 먹으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안팎으로 뒤숭숭한 요즘이지만,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이 편안하다. 할 수 있는 일이 무궁무진하다. 굳이 밖으로 떠돌아다니지 않아도, 더 나은 무언가를 찾거나 바라지 않아도 지금 이대로 행복하다. 한 살 더 먹어서 가질 수 없는 것을 놓아버리리 여유가 생긴 건지, 도전할 용기가 사라진 건지 모르겠지만, 지금이 좋다. 여행을 떠나지 않아도 집에서도 즐겁다.


갑갑한 마음을 밖에서 채우려 할 때엔 늘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아쉬웠는데, 요즘엔 떠나고 싶은 생각 자체가 생기지 않는다. 남들의 시선이나 비교하는 마음이 사그라들었다. ‘오늘 점심은 무얼 해 먹을까?, 오늘은 어느 곳을 청소할까?’ 같은 생각으로 하루가 바쁘다. 물론 어디론가 훌쩍 떠나도 좋을 것 같지만, 예전처럼 떠나지 못해 괴롭지는 않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지만, 나는 조금 변했다. 앞으로 또 어떻게 변하게 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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