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99X 년. 신ㅇㅇ (12세/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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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학교 5학년 겨울방학식 날.
왕십리에 살던 우리 가족이 잠실로 이사를 가는 날이다.
방학식이 끝나면 나는 학교 정문에서 국민학교 2학년인 여동생을 데리고 잠실의 새 집을 찾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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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식이 끝났고, 나는 지하철을 타고 잠실로 향했다.
나는 잠실로 향했다.
나는 잠실로...
나...
나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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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머릿속이 캄캄해졌다. 동생은 어디 갔지?
두 손을 펼쳤다. 응당 내 왼손과 오른손 중 한쪽을 잡고서 거기 있어야만 하는 동생은. 왼쪽과 오른쪽 어디에도 없었다.
'어? 얘가 어디 있지? 아! 정문에서 만나기로 했었는데!'
동생을 놓고 와버렸다.
나의 사정과는 상관없이 나를 실은 지하철은 어느덧 강변역을 향해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황급히 반대 방향 지하철을 탔다.
'어떡하지! 동생을 놓고 왔어! 동생을 놓고 왔어!'
아무리 발을 동동 굴러도 지하철은 속도를 올리는 일 없이 무심히 제 속도로 달려갔다.
왕십리역에 도착했다. 그러나 역에서 학교까지도 결코 짧지 않은 거리였다.
커다란 언덕도 쉬지 않고 뛰어올라 정문 앞으로 갔지만, 동생은 거기에 없었다. 주위를 한참 둘러보았지만 동생은 보이지 않았다. 동생과 엄마의 얼굴이 번갈아 떠올랐다. 그러나 둘 다 거기에 없었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
나는 울고 싶었다. 정말로 울고 싶었다.
아무리 찾아도 동생은 보이지 않고, 손은 시려오고, 별다른 방법도 떠오르지 않아 다시 지하철을 타고 잠실로 향했다.
'하느님, 하느님. 동생을 제발 돌려주세요. 동생이 돌아온다면 정말 착하게 잘할게요, 하느님, 하느님..'
사정없이 달리는 지하철 속에서 나는 하느님께 쉴 새 없이 사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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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낯선 회색 아파트의 계단을 허겁지겁 뛰어올랐다. 울상이 된 채로 대문을 열고 소리쳤다.
"엄, 엄마!!"
낯선 집 안에는 낯익은 얼굴이 있었다. 동생이? 내 동생이!
동생은 이불을 몸에 돌돌 감은 채로 앉아, 새초롬한 표정으로 내게 투덜거렸다.
"오빠!! 오빠 먼저 가면 어떡해! 같이 가기로 해놓고는!"
삐죽거리는 그 목소리에 나는 그만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울상이 된 내 얼굴을 본 엄마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일 있었어?"
2) 199X 년. 신ㅁㅁ (8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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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학교 2학년 겨울방학식 날.
왕십리에 살던 우리 가족이 잠실로 이사를 가는 날이다.
방학식이 끝나면 나는 학교 정문에서 국민학교 5학년인 오빠를 만나 잠실의 새 집으로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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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식이 끝나고, 나는 약속대로 학교 정문으로 갔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오빠가 오지 않았다.
'아이참, 먼저 가버렸나?'
북적이던 학교 앞이 점점 사람이 줄어들더니만 이윽고 적막해졌다. 이젠 손이 많이 시렵다. 슬슬 집에 가고 싶은데, 도대체 오빠는 어디 있는 거야. 아이참.
혼자서는 집을 찾아갈 수 없으니, 먼저 가버린 오빠 말고 엄마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디 가면 엄마를 찾을 수 있지? 오, 성당.'
우리 가족이 오래 다닌 성당인 데다 엄마 친구가 일하고 있으니까 거기 가면 되겠다 싶었다.
눈 감고도 찾아갈 수 있는 성당이다. 또박또박 성당으로 걸어갔다. 마침 엄마가 성당에 있었다. 마지막 볼일을 보러 사무실에 들렀던 참이었다.
"엄마! 나 한참 기다렸는데 오빠가 안 왔어! 먼저 가버렸나 봐!"
이르듯 상황을 설명하고는 엄마 옆에 털썩 앉았다. 나는 엄마 친구가 준 크림빵을 야무지게 뜯어먹으며 엄마의 볼일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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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나는 함께 지하철을 타고 잠실 집으로 왔다.
아직 서늘한 새 집에 막 불을 때고 몸을 조금 녹이려는 차였다. 딸깍, 대문을 따는 소리가 들렸다.
오빠였다.
"엄, 엄마!!"
허, 거참. 오빠는 대문 열자마자 엄마부터 찾는다. 아이참, 내가 학교 앞에서 얼마나 기다렸는데!
"오빠!! 같이 가기로 해놓고 오빠 먼저 가면 어떡해!!"
딸린 동생 없이 혼자 편하게 왔으니 싱글벙글할 줄 알았는데, 오빠 얼굴이 영 엉망이다.
그새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3) 2018년. 신ㅁㅁ (3n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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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니가 기도해서 돌아왔는데.. 내가 잘해야지.."
밤 11시에 떡볶이를 해달라고 말하는 동생에게 손사래를 치던 오빠가, 체념하듯 뱉은 말 한마디에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응? 그게 뭔 말?"
"너 기억 안 나?? 허어.."
쓸데없이 저- 먼 데를 보는 흉내를 내며 오빠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전지적 오빠 시점으로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물론 일이 벌어졌던 그때 이미 한번 들었겠지만, 나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나에겐 디테일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빠에게는 잊을 수 없는 큰 사건이었던 모양이다. 아직도 그때를 떠올리면 그때의 조마조마함이 생생히 떠오른다고 한다.
"그래? 허허 그랬고만.."
"근데 가끔 이럴 때 보면 기도를 잘못했나 싶기도 하..." 그쯤에서 나는 오빠의 등짝에 야무진 스매싱을 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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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무지게 스매싱을 날리고, 야무지게 떡볶이를 먹는다. 이윽고 배가 불러, 여물 대신 이야기를 곱씹어 본다.
'기도해서 돌아왔다고. 기도해서..'
물론 어린 내가 무척 야무지고 똘똘했기 때문에, 침착하게 엄마를 찾아내 무사히 돌아왔을 것이다!
'그러나 기도해서 돌아왔다'는 말에는 이상한 울림이 있었다.
어린 꼬마가 자기보다 더 쪼끄만 동생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했을 때의 그 캄캄함. 동생이 그 자리에 있어주기를 바라는 간절함, 그럼에도 동생은 없는 현실. 방법을 찾을 수 없는 순간에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기도- 을 멈추지 않았던 그 절박함. 그런 것들이 그 말속에서 웅웅 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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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내가 똘똘해서 돌아온 건가?'
아니
간절한 마음과, 그 간절한 마음을 쏘아 올린 사람과, 그 간절한 마음을 들어준 절대자가 있어왔던 게 아닐까. 그 모든 것들이 지금껏 나를 조금 더 안전한 곳으로, 조금 더 따뜻한 곳으로 이끌어 준 것은 아닐까.
큰 탈 없고 큰 문제없어 별 것 없어 보이는 평범한 지금의 나는, 사실 수많은 마음과 기도와 보살핌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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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해서 돌아온'
그래서 가끔 가만히 저 말을 떠올린다.
나를 위해주었던 사람들과 나를 지켜보았을 절대자를 떠올린다. 그들의 마음을 뒤적여 살펴본다.
따뜻했을, 때론 간절했을 마음들을 느껴본다. 흐뭇해지다가, 곧 아릿해진다.
내가 받은 그 마음과 기도들이 사라지지 않길, 나를 통해 다른 사람에게로 전해지길.
나도 따라 기도하는 마음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