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님이 왜 거기서 나와요?

영화 [1987]과 나의 주임신부님

by 릴리슈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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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꿈이 수녀였다.
유아 영세를 받고 어릴 때부터 신앙생활을 했다. 모든 게 어머니 김여사의 의지였지만, 성당은 푸근하고 따뜻한 곳이어서 나도 좋아했다. 성당에는 특히 천사 같은 분이 계셨다. 수녀님이었다. 성당에서 살다시피 하던 어린 나에게, 먹을 것이나 작고 귀여운 것을 주셨다. 딱히 줄만한 게 없으셨을 때면, 부드러운 손길이나 따뜻한 눈빛을 가득 건네셨다. 피부와 웃음이 맑고 뽀얀 수녀님을 보며 나도 수녀님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십여 년 뒤, 내 술 먹는 모양새를 보며 알게 되었다. 나는 수녀님이 아니라 한량에 가깝다는 것을.


성당에는 천사 말고 악ㅁ.. 무서운 사람도 있었다. 주임신부님이었다.

보좌신부님이나 부제님은 우리 어린이 친구들에게 환하게 웃어주셨는데, 주임 신부님은 호랑이 같은 인상에, 웃음이 거의 없으셨다. 게다가 풍채가 아주 좋으셨기 때문에 존재 자체로 나는 위압감을 느꼈다. 머리가 벗어지셔서 멀리서도 반짝이셨지만, 그 반짝임을 소재로 한 장난을 쳐볼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 그 반짝임은 오히려 후광처럼 주임신부님에게 위엄을 더해주었기 때문이었다. 하여 나와 친구들은 성당을 누비며 놀다가도, 주임신부님을 발견하면 숨이 턱 끝까지 차도록 달려 어느 구석엔가 쏙 숨곤 했다. 혼날 일도 없었는데 괜히 늘 무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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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그런 주임신부님이 우리 집에 오셨다.

지역을 방문하시는 겸 저녁식사를 다 같이 하기로 했는데, 그 장소가 우리 집이 된 것이었다. 어머니가 레지오 단장인지 구역장이었기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우리 집이 그나마 조금 커서 그랬는지 잘 모르겠다.

낯을 엄청 가리던 나는, 잔뜩 모이는 낯선 사람들 중에 심지어 주임 신부님이 계신다는 얘기를 듣고 나의 아지트인 옥상에 숨어있었다. 허나 주임신부님은 나에게 축복을 주시려고 거듭 나를 찾으셨다.

축복을 받으면 천당에 간다는데, 정작 나는 옥상 계단을 걸어 내려가는 나는 지옥불에 걸어 들어가는 마음이었다. 안방까지 끌려가듯 걸어들어가 주임신부님께서 내게 축복을 내려 주셨나? 아니면 내 예상대로 지옥불을 보여주셨나? 그건 기억나지 않는다. 덜덜거리며 옥상 계단을 내려가던 장면 이후로는 나에게 어떤 기억도 남아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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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1987] 이 개봉했다.
근현대사를 다룬 영상물들은 마음이 괴로워서 잘 보지 못한다. 허나 먼저 보고 온 오빠가 그 정도는 견딜 수 있을 거라고 해서 김여사와 보러 갔다. 처음에는 하정우의 멋짐에 심취하다, 나중에는 김태리가 잡혀갈까 무서워 덜덜거리다 보니 어느덧 영화는 엔딩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이윽고 명동성당. 성당 안 제단 앞에서 성명을 발표하는 신부님의 이름이 자막으로 떴다.


<김승훈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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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신부님이 왜 거기서 나와요?'

옆에서 김여사가 속삭인다.

"너 기억나? 마티아 신부님?"

근엄한 표정으로 성당 앞마당을 가로지르던 주임신부님의 모습이 스크린 위에 겹쳐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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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끝나고 집에 돌아오는 내내. 그리고 돌아와 점심을 먹으면서도, 김여사와 나는 영화와 그때의 삶과 신부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너 신부님 오셨을 때 낯가려서 옥상에 숨고 그랬잖아."
"아휴, 내가 진즉에 알았으면 얼른 내려가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노고가 많으시다고 큰절 한번 올렸을 텐데.
일곱 살이면 응당 그 정도는 알아서 했어야 했는데.."

죄송한 마음에 괜한 너스레를 떨었다.

그리고 그 너스레가 시답기 짝이 없어 금방 창피해졌다. 입을 닫았다. 무서워만 했던 근엄한 얼굴 뒤로 당신이 지고 있었을 무게가 가늠되지 않았다. 가슴이 묵지근하게 눌리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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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신부님의 다큐며 기사를 잔뜩 찾아 읽었다.

세상을 떠나신 지 13년이 지난 오늘, 신부님의 발자취를 새삼스레 그렇게 찾았다. 굵직한 역사의 도막 그 풍경 속에 낯익은 당신의 얼굴을 낯설은 흑백으로 발견했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당신이 행한 정의와 용기와 따뜻함에 대해 회고하는 것을 찬찬히 읽어보았다.

신부님의 얼굴은 어린 내가 늘 보아오던 그 표정이었지만, 무서워만 했던 그 얼굴이 이제 다르게 읽힌다. 내 삶 속에서 당신이 잠시나마 함께 호흡하셨었다는 것으로, 나는 괜히 내 삶이 조금 뿌듯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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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나에게 축복을 주셨을 그 순간의 당신 손의 무게나 언어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당신이 삶을 걸어 만들어낸 역사야말로 거대한 축복이었음을 이제와 깨닫는다.

"당신께서 다 아십니다." 라는 말씀을 즐겨하셨다던 신부님,

그 '당신'을 삶 속에서 늘 만나셨을 테니, 생의 모든 순간들이 천당의 시간들이셨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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