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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대한 포부를 품고 매운탕 뚜껑을 열었다.
그러나 냄비 속에는 앙상한 광어 뼈다구 뿐이다.
'악몽인가!'
눈을 번쩍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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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의 다섯 형식> 이 눈 앞에 펼쳐져 있다.
그래, 잊고 있었을 뿐, 알고는 있었다.
나의 영문법이 얼마나 앙상한가를.
펼쳐진 페이지에는 오래전에 적어둔 나의 필기가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낯선 내용들.. 그 앞에서 나는 문법책에게나 나 자신에게나 뭐라 할만한 적절한 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 자니?)
어떤 이유로든, 하지 않으면 모든 것은 그냥 그 자리에 멈춰서 있다. 인생에 진리가 있다면 이것뿐일 것이다.
지극한 보통사람인 내가 이 진리를 비껴갈 여지란 있을 리 만무하다. 하여 영문법 앞에서 몇 번이고 멈춰 섰던 나의 영어 뼈대는 매운탕 냄비에 가지런히 누운 광어뼈다귀와 매한가지일 수밖에 없다.
아, 나는 왜때문에 이토록 오랫동안 멈춰서 있는가, 어째서 끝없이 영문법에 대한 윤형 방황을 해오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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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신동이었다.
나도 그랬다. 3세 경, (만 3세 아님) 알려주지 않은 한글을 혼자 뗐다거나,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사자소학을 읽고 쓸 줄 알았다는 정도의 일화쯤은 몇 가지 있었다.
그러나 자라면서 완벽에의 강박은 불완전함에 대한 수치심으로 옮겨갔고, (그저 못하는 건 안 했다는 뜻)
더불어 타고난 낯가림은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을 어렵게 만들었다. (그저 낯선 건 안 했다는 뜻)
휴가는 물론 주말도 없다시피 하며 보냈던 지난 10년간의 직장생활도 나를 광어 뼈다구에 머물게 하는데 큰 몫을 했다. (그저 사원 주제에 자기가 사장인 줄 알았다는 뜻)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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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좀 더 변명을 이유를 늘어놓고 싶다.
그러나 옆에서 예순을 훌쩍 넘긴 김여사가 영어단어를 100개째 외우고 있다. 때문에 더 말을 꺼냈다간 영문법 중환자에다가 호로자식이라는 타이틀까지 거머쥘 것 같아 그만둬야겠다.
“제가 아무래도 수식어 같은 거 달고 이러는 거 좀 부담스러워하는 편이어서요,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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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어 하는 김여사는 저렇게 바지런히 치어를 키우기 시작했다. 언젠간 저 놈을 크게 키워다가 타고 다니며 온 세상을 둘러보고 말 거라고. 그리고 그 말 끝에 한마디 덧붙이신다.
“너는 나보다 더 많이 배웠지 않니? 난 니가 부럽다야.”
...
그렇습니다 어머니..
그래서 광어 뼈다구 같은 나의 영문법에 살점을 좀 붙여볼까 한다.
단박에 오통통통 살을 올릴 생각만 관두면 꽤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오늘은 광어 뽈살만 조금 붙여보는 걸로. 주어, 동사, 목적어, 목적격 보어만 조금 떼어다 붙여보는 걸로. 그래서 나도 조금 더 멀리까지 나아가 볼 생각을 하는 걸로. 그런 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