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순간

by 소란화

최근 엄마가 집에 오셔서 잠깐 놀다 가셨다. 항상 바쁘신 엄마께는 드문 휴일이었다. 창밖에서 유달리 햇빛이 강하게 들어오고 있었다. 문득 엄마가 무언가 떠올리려는 듯 가물거리는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나는 너희 집에서 여기가 참 좋아. 응? 내가 되묻자, 엄마가 웃으시며 말을 이었다. 햇빛이 들어오는 이쪽 말이야. 어릴 때 집에서 항상 창문 근처에서 놀았거든? 이웃집 친구들이 놀러오면 걔네들이랑 종이인형 가지고 창가 아래에서 노닥거렸어. 햇빛이 따뜻하게 등을 타고 흐르는 느낌이 참 좋았어. 모든 게 다 완벽하게 느껴졌어. 온도, 습도, 내 기분, 친구들 얼굴, 종이인형의 감촉까지.


엄마가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기껍게, 그것도 행복이 만연한 표정으로 술술 풀어낸 건 거의 처음이나 다를 바 없다. 엄마의 어린 시절은 항상 무언가로 얼룩져 있었다. 가난, 가정불화, 폭력, 경쟁, 외로움. 그런 엄마가 다 늙어 딸의 신혼집에 찾아온 어느 날 빙그레 웃으면서 말한다. 나는 햇빛이 비치는 창가에 앉아 종이인형을 갖고 노는 일이 진심으로 행복했노라고. 온 몸에 힘을 뺀 채. 그토록 힘주어 열심히 살아온 지난 날들, 수천 가지의 기억 속에서 단 하나, 찬란하게 빛나는 어떤 순간을 끄집어내 내 앞에 수줍게 펼쳐 보인다. 이게 나야. 네 엄마 000이 아니고, 이게 진짜 나.


모르겠다. 그냥 그 순간을 꼭 기록하고 싶었고, 어딘가에는 남기고 싶었고, 아마도 그 순간이 내가 먼 훗날 우리 엄마를 기억할 때 거의 가장 먼저 떠올릴 장면일 것만 같은 강한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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