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할머니는 현재 인지증으로 누워계신다. 요양보호사님의 도움을 받으며 지내고 계시지만, 거동이 아예 어려우신 수준은 아니다. 그래도 종종 할머니댁에 방문하면 할머니는 꼬옥 손주인 나를 호출하신다. 아주 작은 것 하나도 모두 시키고 싶어하신다. 문제는 호출이 3분 단위라는 거다. 소란화야. 불러서 가보면 근처에 있는 티슈곽을 달라 하신다. 소란화야. 또 불러서 가면 이번에는 티슈곽을 도로 제자리에 둬 달라는 부탁이시다. 대체로 이런 식의 호출과 응대가 수십번 오고가다보면 하루 반절이 지난다. 어렸을 적 조부모의 차고 넘치는 사랑을 받은 나이지만, 하루를 그렇게 보내고 나면 절로 한숨이 나온다. 새삼 요양보호사님의 노고를 가슴 깊이 새기게 되는 거다.
아가가 태어나고 느낀 것이 있다면 아가를 돌보는 일과 노인을 돌보는 일이 본질적으로 큰 차이가 없다는 점이다. 커가는 이와 늙어가는 이, 시간의 방향성을 제하면 두 노동 모두 절대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케어하는 일이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다만 어떤 산후관리사님이 얘기해주셨듯 아가가 노인보다 훨씬 가벼워서 수월하다는 명백한 사실을 제외하고 말이다. 아가든 노인이든, 시간 맞춰 먹여야 하고 홀로 씻을 수 없어 목욕시켜야 하며, 혼자만 두면 외롭고 심심해하므로 놀이동무나 말벗이 되어주어야 하고, 철따라 온습도를 고려해 적당한 착장으로 옷을 입히고 벗겨야 하며 생활하는 공간의 청결도 신경써야 한다. 하지만 다른 무엇보다도 아가와 노인 돌봄 모두 '5분 대기조'의 자세로 임해야 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내 할머니는 3분마다 나를 호출하셨지만, 3분이나 5분이나 결과적으로 언제나 돌봄의 대상자 주변에 꼼짝않고 머무르며 그의 심사와 위생, 필요와 욕구를 세심히 살펴야 하는 것에는 차이가 없다.
이러한 가운데 시간은 조각난다. 산산조각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다. 돌봄의 주체에게 허락되는 시간은 3분과 5분 사이, 그 어디쯤이다. 짬을 낸다,는 말의 의미를 실감하게 된다. '통'의 개념은 저만치 삭제된지 오래다. 잠도, 식사도, 일상적인 활동도, 가사도, 요리도, 일반 업무도, 취미활동도, 하다못해 휴대폰 검색이나 티브이 시청 등 가장 간단하고 기초적인 일까지도 모두 조각조각의 시간 속에서 조각조각으로 흩어지고 만다. 아가가 태어난 후 티브이 프로그램 한편을 온전히 몰입해서 본 기억이 없다. 할머니댁에 방문하면 휴대폰으로 무언가를 검색하려는 찰나에 할머니의 불호령이 떨어진다. 그러니까 이 산산조각난 시간들 속에서 돌봄의 주체인 나도 산산조각나고, 내 삶도 조각난 파편들처럼 날카롭고 어지럽게 무질서해져버리는 것이다.
누군가의 요구에 절대적으로 붙들려 그의 수족 심지어 머리가 되어주어야 하는 상황은 자연스러운 게 아니다. 여성은 날때부터 희생적이거나 돌봄에 특화된 것이 아니라 이 산산조각의 노동을 수행하면서 비로소 돌보는 몸으로 훈련되고마는 것이다. 시간만 조각나는 것이 아니다. 그녀의 신경, 몸, 생각의 흐름이 모두 가루처럼 부스러져내린다. 한 팔로 아기를 안고 젖을 물린 채 다른 한 팔로 손을 움직여 부지런히 밥을 씹는다. 멀티도 이런 멀티가 없다. 변기에 반만 걸터앉아 머릿속으로는 화장실에서 나가자마자 해야할 일을 생각한다. 돌봄수행자는 돌봄이 지속되는 동안 온전한 자아를 갖는 걸 포기해야만 한다.
'가만히 앉아' 아이나 노인을 돌보는 일이 뭐가 어려울까. 예전엔 미처 몰랐었다. 돌봄의 대가로 무엇을 지불해야만 하는지 그 누구도 알려준 적이 없기 때문이다. 돈으로도 환산할 수 없는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이라는 감각이었다. 그러나 오늘도 돌봄의 시간은 어김없이 흘러가는 중이고, 나는 조각난 내 자아들을 어떻게든 이어붙여 형상이라도 유지하고자 이 글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