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동 가는 길에 매봉 전철역을 지나쳐 갔다, 매봉역에는 오래전 남편이 일하다가 다쳐서 수술받고 입원해 있던 영동 세브란스가 있다. 전철은 무심히 매봉역에 정차했다가 떠났지만 내 마음은 그곳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 남편을 간호하던 옛일이 생각났다. 남편이 사고 났다고 알려온 건 큰아이의 수술이 끝나 퇴원하던 날이었다. 큰아이는 아데노이드가 비정상적으로 크고 편도선도 부은 데다 고막에 물이 차 있어서 바로 수술해야 한다고 했다. 수술하고 퇴원하던 날. 남편과 같이 일하는 과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영동 세브란스 병원인데 남편이 조금 다쳤다며 와 달라고 했다. 큰아이도 아직 성치 않은데 남편이 다쳤다니 걱정과 함께 겁이 났다. 떨리는 마음을 추스르며 병원으로 갔다. 응급실 앞에 있던 과장은 나를 붙잡았다.
“놀라지 마세요. 좀 심하게 다쳤는데 수술하면 괜찮을 거예요.”
다리에 힘이 풀렸지만 응급실로 들어갔다. 발에 붕대를 감고 누워 있는 남편이 보였다. 처음엔 발만 다친 줄 알았는데 허리도 다쳐서 수술해야 한다고 했다. 의사가 와서 발뼈를 맞추어 주었다. 환자는 아파 죽는다고 소리를 질러댔지만 아무렇지 않게 뼈를 대충 맞추고 발에 붕대를 다시 감아 주었다.
“그래도 옥상으로 떨어졌으니 얼마나 다행이야.”
라고 한다. 이게 무슨 소리람. 옥상에 있는 간판을 손보다가 안전바에 묶인 밧줄이 풀어지면서 떨어졌다고 했다. 의사는 이십 층 건물 아래로 떨어졌으면 큰일 날 뻔했다며 다른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자리를 이동했다. 팔이 부러져 들어온 아이는 악을 쓰고 울어대고 의사는 괜찮다며 아이가 소리를 질러도 부러진 팔을 맞추고 있었다. 대학병원 응급실은 밤새 환자들의 신음이 들려왔다. 병실이 나지 않아 응급실에서 밤을 지새우며 간호하다 보니 나조차 병이 날 것 같았다. 며칠 동안 큰아이의 수술로 긴장했었는데 남편도 수술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아찔했다. 간 수치가 높아서 약을 먹고 며칠 두고 봐야 할 것 같다고 했다. 밤을 새워가며 간호하는 일은 나에게 너무 벅찼다. 남편은 허리가 부러지고 발뒤꿈치가 산산조각이 났으니 조금 움직이기만 해도 통증이 파도처럼 밀려오는지 온갖 짜증을 다 부렸다. 통증으로 인한 고통을 주변의 모든 것에 날을 세우는 것으로 표현했다. 날카로운 짜증들은 간병하는 나에게 날아왔다. 던지는 당사자도 아픔에 못 이겨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에게 갑 티슈 통이 날아왔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었나 보다. 갑자기 날아온 갑 티슈 너머로 보이는 남편의 화난 표정이 드러나 있었다. “물 좀 달라고!”
목이 말라 물을 달라고 했는데 응급실의 소음으로 인해 내가 듣지 못하니까 근처에 있던 갑 티슈를 던진 것이다. 피곤함에 절어있던 나는 ‘나도 힘들다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말없이 물컵에 빨대를 끼워 물을 먹여 주었다. 너무 힘들어서 어디론가 숨고 싶었다.
병실로 옮기고 나서 머리를 감겨 주었다. 사람의 머리 무게가 그렇게 무거운지 처음 알았다. 환부에 물이 들어갈까 긴장하며 머리를 감겨주고 나니 땀과 물로 내 옷이 다 젖어 있었다.
한밤중에 의사가 서류를 가지고 왔다. 내일 아침 수술 예정이라며 수술 동의서에 사인을 하라고 했다. 수술 시 일어날 모든 일을 온전히 내가 책임지겠다는 수술 동의서. 어떻게 해야 하나 창가를 서성였다. 밖에 함박눈이 소복소복 내리고 있었다. 차가운 눈발이 내 가슴에 와닿는 듯 선뜻하게 느껴졌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고 싶었다. 큰 시누이에게 전화했다.
“사인해야지 어쩌겠어.”
시누이의 말이 틀린 답은 아니지만 나는 쿵 하고 가슴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책임이라는 것이 이리 무섭구나. 벌벌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남편이 수술실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홀로 이 모든 것을 감당하기엔 너무 힘들고 벅찼다.
무사히 수술이 끝나고 간병하느라 몸은 힘들었지만 수술 전보다 마음은 편안해졌다. 시간이 지나고 시누이가 남편의 병간호를 자처했다. 그때부터 병원 밥이 싫다는 남편을 위해 잡곡밥에 나물, 불고기, 된장 뚝배기를 바리바리 해 날랐다.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도 점심시간에 늦을세라 바쁘게 매봉 터널을 지나 언덕 위의 입원실로 올라가면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남편은 이년 가까이 병원 생활을 했다. 지금은 별일 없이 생업에 종사하고 있다. 별일 없이 잘 지내고 있다는 것이 행복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