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집과 세 분의 부동산 사장님 3
< 소금빵 사장님의 카리스마 >
"안녕하세요, 방 세 개짜리 아파트 전세로 찾고 있어요, 네 식구에요."
단정한 단발머리에 안경을 쓴 소금빵 부동산 사장님이 빼꼼히 들어온 나를 보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여기 전세는 많이 있어요, 가격대는 어떻게 보세요?"
"어... 가격대는... 그냥. 일단 최대한 괜찮으면서 싼 집으로 보여주시면......"
(어떻게든 맞춰서 대출을 해보려구요)
"네, 기다려보세요."
말 끝을 흐리는 내가 실수요자가 맞나 능력은 되나 미심쩍을 만도 한데 사장님은 진지한 자세로 매물을 검색했다.
"지금 보러 가도 되겠네요. 오래된 아파트이긴 한데 32평형이에요."
(아... 전세자금 대출만 믿는다!)
소금빵 사장님과 함께 도착한 곳은 15층 이하의 오래된 아파트였다. 단지는 하나, 동은 101동과 102동이 전부였다. 동이 두 개 밖에 없어서 특이하게 느껴졌지만 싫은 건 아니었다. 어차피 전셋집을 구하는 거라 단지 규모와 세대수는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조금 전까지 주차장도 없는 좁은 골목, 엘리베이터 없는 빌라 꼭대기에 있다가 나왔기에 그런 것들은 아무래도 좋았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층수를 누르고, 땡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릴 때 심장이 다 두근거렸다. 꺾어진 긴 복도를 따라 걷는데 중간쯤에 열려 있는 문이 보였다. 그 집이구나!
열린 문으로 파란 가림막 천이 펄럭거리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맞아주신 분은 50대 초반 정도의 여자분이셨다.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친한 친구 땡땡이 어머니랑 닮으셨다. 그다음은 여자분의 곧은 자세, 여유로운 눈빛, 간결한 말투가 참 멋지다는 생각.
"이사 들어오시기 전에 싹 고쳐 드릴 거니까 감안하고 보세요."
"네... (딴 데 보며) 맞바람이 치네요?"
"베란다 문이랑 현관문 이렇게 열어 놓으면 시원해서 여름에도 에어컨 안 틀고 지내요."
주인분의 말에 끄덕끄덕하면서 베란다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포물선을 그리며 드리운 대추야자나무와 식물 화분들이 옹기종기 모여 밝고 따사로운 햇살을 받고 있었다. 베란다 창이 하늘을 담은 액자 같았다.
"층수가 9층 정도 밖에 안되는 데 하늘이 굉장히 잘보이네요, 신기해요."
"이 동네 높은 건물 못 올리잖아요. 저쪽 복도 쪽으로는 산 두 개가 다 보이고요."
직전에 공갈빵 사장님이 이사 갈 집도 본인에게 계약하라며 이 집 저 집 보여주었기에 비슷한 평형의 많은 집을 보았지만 이렇게 남향에 앞에 장애물이 없고 (맑은 날엔 눈곱만하게 남산 타워가 보이고) 하늘이 닿아 있는 집은 없었다.
이사를 하도 다녀서 원래 집을 볼 때 전투적으로 곰팡이, 보일러, 수압 등을 체크했는데 이 집에선 의욕이 없었다. 꼿꼿하고 여유롭고 기품 있는 표정의 여자분이 성인이 된 두 아들을 여기서 다 키우셨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안 봐도 살만한 집일 것 같았다.
집주인분께 인사를 드리고 엘리베이터를 타며 소금빵 사장님께 말했다.
"저 더 안 보고 여기로 계약할게요."
"그럴래요~? 여기 초등학교도 코앞이에요." 나가서 보니 정말 초등학교랑 중학교가 좁은 길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었다. 현관에서 학교까지 5분이면 될 것 같았다.
"아, 저 여기 너무 좋아요 사장님! 여기서 딸들 초등학교 다닐 동안 쭉 살면 너무 좋겠어요."
흥분해서 감정을 드러낸, 아니 사실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는 못 배기는 성격이라 감격한 표정을 지으며 작은 소망을 이야기했는데 사장님이 바로 찬물을 끼얹으셨다.
"어쩌지, 여기가 전세는 2년만 주고 2년 후엔 팔고 외국으로 떠나신댔어요."
순간 다리에 힘이 탁 풀렸다. 이게 다섯 번째 집인데 2년 후에 또 여섯 번째 집을 찾아 나서야 한다니. 눈앞에 있던 두 아들의 멋진 어머니가 서있던 저 집, 그 자리에 내가 있으면 정말 바랄 게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간절했는지 이성의 제지를 뿌리치고 제 멋대로 말이 튀어나왔다.
"사장님, 어차피 2년 후에 매도하실 거면 그냥 지금 저한테 팔으시라고 하면 안 될까요? 제가 사고 싶어요."
아뿔싸! 전세 자금도 간당간당한데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지만 나의 후회보다 소금빵 사장님의 반응이 빨랐다. 안경 너머 눈동자가 반짝, 하고 빛난 것이다. 찬스를 잡은 승부사의 눈빛 같았다.
그분은 호들갑스럽지도 않았다. 차분하게 목소리를 낮추시더니 눈을 똑바로 맞추고는
"정말 매매를 원해요?"
"네..." (될지 안될지도 모르니 일단 고.)
"그럼 지금 원하는 가격을 말해줘요. 내가 그 가격에 사게 해줄게요."
다리가 휘청할 것 같은 카리스마였다. 원하는 가격이라니. 그렇다고 천만 원이요, 1억이요! 할 수는 없으니 얼른 머리를 굴려봤다. 아, 공갈빵 사장님! 마침 공갈빵 사장님이 강제 주입식으로 전화로 문자로 현장 방문으로 보여줬던 30평대 아파트 매매가들이 떠올랐다. (그분은 전세를 보여달라는 나에게 매매 물건만 보여주었다.) 그 매물들의 장단점과 금액을 고려하니 평균적인 가격이 나왔다.
그런데 금액을 직접 결정하라는 건 일종의 '찬스'이니까, 내 입장에서 거래가 성사될 수 있는 금액에 가까이 가기 위해서 평균 가격보다 3천만 원을 낮춰서 말씀드렸다. 3억 5천만 원대를 말한 것이다. 사실 이 금액도 재정 상태로는 아예 불가능한 금액이지만. 안되면 전세로 살면 되니까.
"알겠어요, 이따 연락드릴게요. 들어가 보세요!"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