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3학년 첫째 아이의 수학 문제집을 넘겨보며 "왜 아직도 숙제 안 했어!" 하려는 찰나, 며칠 전 아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엄마, 컴퍼스가 필요한데 학교 앞 문구점이 계속 닫아 있어요. 컴퍼스 좀 사주세요."
아이의 숙제를 다그치려면 컴퍼스가 필요했다. 비가 쏟아지는 창밖을 보니 한숨이 나오는데 태풍이 생각났다. 태풍이 오기 전에 나가야 한다는 압박감 덕분에 벌떡 일어나 우산을 집어 들었다. 태풍이 서울을 지나는 시간이 대략 밤 9시라고 했으니, 지금이 아니면 안 돼! 하며.
1층 공동 현관 앞에 서니 분주한 경비 아저씨와 더 바쁜 택배기사님, 집 앞을 살피는 주민들이 보였다. 인사를 나누고 서둘러 빗속으로 돌진. 태풍이 아직 다른 지역에 있다고 들었는데, 바람이 거셌다. 높은 나무들이 사정없이 흔들리고 쓰레기들이 거리에 나뒹굴었다. 우산이 뒤집혀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사람도 보였다. (친정)엄마는 집에 있으실 게 분명하기에 걱정보다는 호들갑스러운 마음으로 전화를 걸었다.
1. 엄마와의 통화
나: 엄마, 나 지금 밖인데, 바람이!!! 나무가 막!!! 뼈대만 남은 우산 들고 가는 사람도 있어.
엄마: 어머 어머! 창문을 지금부터 닫아야겠다!
(갑자기 남동생이 오늘 쉬는 날이라 집에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나: 엄마, 김 OO은 집에 있어? 설마 밖에 나간 건 아니지??
엄마: 그 녀석, 그 카페는 아닌데 카페 같은 곳에서 공부 한다고.. 거길 뭐라고 했더라
나: 스터디 카페?
엄마: 어! 스터디 카페 갔어!
나: 엄마, 걔 내일 출근하려면 8-9시쯤 돌아올 텐데. 태풍이 서울 지나는 시간이잖아?!!
엄마: 어머 어머! 얘, 걔 내 말은 안 들으니까 니가 전화 좀 해봐.
동생한테 전화하려는 데, 365일 외출 중, 항상 어딘가를 걷고 있는 아빠가 퍼뜩 떠올랐다.
2. 아빠와의 통화
아빠: (부스럭부스럭... 윙) 소리가 잘 안 들린다
나: (소리 지르기 시작) 아빠! 어디야!! 밖이야??
아빠: 어? 왜! 나 지금 멀리 있는데? 무슨 일 있어?
나: 아빠, 아직 태풍 오지도 않았는데 바람이 너무 쎄!
아빠: 알았어, 딸, 목소리 좀 낮춰
나: 빨리 들어가라구! 언제 들어가려고 그래!
아빠: 목소리 좀 낮춰, 소리가 너무 쎄. (아아, 우리 딸이 걱정된다고..속닥속닥) 알겠어, 금방 들어갈거야.
나: 꼭! 태풍 9시다!
통화 하는 사이 신발이 다 젖고 등도 다 젖고, 우산은 어깨에 세게 눌러도 꿈틀꿈틀 휘청휘청했다. 그럴수록 전화에 대한 의욕이 불타올랐다.
3. 남동생과의 통화
동생: 어.
나: OO아! 너 스터디 카페라며. 몇 시에 집에 들어갈 거야?
동생: 8시 9시.
나: 야! 김 OO! 그때 서울에 태풍 지나간다고. 얼른 집에 들어가.
동생: 아 됐어.
나: 뭐가 돼? 태풍이 아직 오지도 않았는데 벌써 엄청 쎄! 뉴스에서 간판이~~ 맨홀 뚜껑이~~~
동생: 아 됐어.
나: 됐다니? 9시에 집에 가겠다?
동생: 나도 체크하고 있어.
동생: 그때가 태풍의 눈이라 오히려 여기는 비도 안 오고 바람도 멈출 거야.
나: !!!
동생은 태풍의 눈 속을 걸으려나 보다.
하지만 내가 어떤 말을 해도, 아니 오히려 호들갑을 떨면 떨수록 동생은 더 강하게 "됐.어."라고 하니 포기할 수밖에. 동생은 처음 전화받는 순간부터 태풍의 눈처럼 고요하고 잠잠했다. 평소에도 전생에 선비 아니면 청교도가 아니었을까 싶은 흐트러짐 없는 담담함과 절제 된 말투에 나는 오두방정을 떠는 사람처럼 되어버려서 민망했는데, 오늘도 그랬다.
그러는 사이 문구점에 도착해서 컴퍼스와 이것저것을 사는데 동생에게 이런 사진과 카톡이 왔다.
너한테 내가 무슨 말을 하랴. 저러다 태풍 빌런이라고 기사에 나오면 어쩌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문구점을 나가려는 데, 강풍에 문이 움찔 움찔 하고 있었다. 문을 밀자 바람이 휘몰아쳐 들어왔다.
안되겠다, 이거 심각하군. 어머니께도 전화를 드려야겠어.
4. 시어머니와의 통화
어머니: 여~보~ 세~~요오~~ ^^
나: 어머니이~~~~~
어머니: 으응~~ 웬일이야~~
(*평소에는 시부모님께 안부 전화를 잘 안 드린다. ㅠㅠ 오히려 어머니께서 음식을 보내시거나 물어볼 게 있으실 때 전화하신다. 하지만 가끔, 길을 걷다 문득 어머니는 어떻게 지내시나 궁금하거나 아이들 때문에 웃긴 일이 있을 때 전화를 드려 한참 수다를 떤다. 자주는 아니지만 자발적으로(?!) 아니 마음이 움직여서 하기 때문에 통화를 하면 웃음꽃이 핀다.)
나: 어머니, 저 지금 밖인데요, 비가 많이 와요.
어머니: 응, 비가 많이 오지. 근데 너는 왜 밖이야,
나: 첫째 준비물 사느라요.
어머니: 첫째 준비물? 무슨 준비물? 아직 방학 아니야~?
나: 아~ 아니요, 학습지 푸는 데 컴퍼스가 필요해요! 그래서 잠깐 나왔는데, 막 우산이 꺾이려고 하고.. 어머니 밖이시면 얼른 들어가시라고 전화드렸어요.
어머니: 맞아, 나도 얼른 들어왔어. 애들 아픈 건 다 나았니?
나: 애들 아픈 건 거의 나아가는데요... 오빠가 (남편) 감기를 옮아서...... 9월에 수술하고 쓰려던 휴가 큰맘 먹고 앞당겨서 이번 주에 썼는데, 어디 가지도 못하고 아프기까지.....흑흑. 불쌍해요.......
어머니: 아이구........ 진짜 불쌍하다...... 어쩌니...... 에휴~~ (많이 걱정하시진 않는 목소리 ㅋㅋ)
나: 아, 태풍이 오고 있다고........ 바람이 벌써 너무 세서........ 얼른 들어가시라구요.
아버지: (그런 건. 내가 어련히 알아서 할 텐데.) 그래. 알겠다. 고맙다. 또 통화하자!
나: 네...... ^^;;;;
전화를 끊고 든 생각, 작고 여린 몸으로 경제활동을 하고 계신 양가 엄마들은 귀가해 집에 계시고, 밖에서 무슨 일을 하시는지 알 수 없는 양가 아빠들은 태풍 전야에도 밖에 계시다는 사실에 웃음이 났다. 그리고, 당연히 집에 계시겠지만 목소리가 듣고 싶은 나의 왕할머니께 끝으로 전화를 드렸다.
6. 시할머니와의 통화.
할머니: 여보세요?
나: 할모니~~~~
할머니: 호~ 호호호호! 꽃님이로구나! 잘 지내니~~~?
나: 네~ 할머니 잘 지내시죠!
할머니: 나야 잘 지내지, 애들은 잘있고? 애들 많이 컸니?
나: 네, 많~~~~~~이 컸어요.
할머니: 하하하하^^
나: 할머니, 곧 태풍이 온다는 데 벌써 바람이 세서, 걱정 돼서 전화드렸어요.
할머니: 그래, 맞아.
나: 밖에 나가시지 말라구요.
할머니: 그럼, 이런 날은 집에 가만히 있어야지. 태풍뿐이니? 요새 감기도 유행이라더라.
나: 맞아요~ 저희 지금 다 감기 걸렸어요.. 둘째는 심지어 폐렴... (앗! 이건 말하지 말걸)
할머니: 응? 둘째는 뭐라고?
나: 아 둘째도 감기 걸렸어요.
할머니: 에구, 그래.. 요새 그게 유행이라더라. 조심해야 해.
나: 네, 할머니. 창문 잘 닫으시고요, 감기 조심하시요. 그리고 다음 달에 추석이니 그때 뵈어요!
할머니: 그래그래~ 그때 보자, 고맙다!
처음 시댁에 인사드리러 간 날부터 시작해서 시댁과의 다툼이 있던 때에도, 그 후에도 한결같이 함박웃음으로 반겨주시고 '예쁘다.' 하시던 할머니의 미소가 떠올랐다.
나처럼 호들갑스러운 엄마, 목소리 좀 낮추라는 말만 반복하는 아빠, 태풍의 눈 부분은 안전하다는 소리나 하는 이상한 남동생, 콧소리로 반겨주시는 어머니, 언제나 바쁘고 근엄한 아버지.
컴퍼스 때문에 밖에 나가보지 않았다면 전화드릴 생각을 못 했을 텐데 즉흥적인 성격 때문에 오랜만에 온 가족 목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이번 태풍의 위력이 엄청 센 것 같은 데, 모쪼록 어느 지역의 그 누구도 다치지 않고 안전하기를 기도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