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록아! 삶은 딱 한 번이야. 두 번은 없어! 딱 한 번뿐인 소중한 인생이야. 하기로 했음 정말 후회 없이 해야 나중에 미련이 남지 않을 거야. 어쩌면… 하고 싶어도 못 하는 상황이 올 수도, 하고 싶었던 게 뭔지 기억나지도 못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어. 정말 두려운 건 그런 거야. 할 수 있는데 망설이는 건 별로 두려운 게 아닐 거야.
-글 최종훈, 그림 지민 <나빌레라 2> 위즈덤하우스-p129
카톡! 고요한 시간을 깨고 알림음이 들렸다. 휴대폰을 들여다보니 친구들 단톡방에 톡이 와있었다.
“다들 어떻게 지내시나요. 새해부터 다시 발레 할까 하는데 시간 되면 같이 해요.”
다시, 발레라… 생각만으로 설렜다. 발레라 하면 제일 먼저, 몸의 선이 떠오른다. 어깨에서 팔을 타고 내려온 물방울이 손가락 끝에서 똑똑 떨어질 수 있는 알라세콘(a la seconde)을 해본다. 포즈 하나에도 코끝이 찡했다. 발레가 그리웠나 보다. 3년 동안 신지 못했던 슈즈를 찾아들었다. 조심스레 발을 넣었다. 신데렐라가 유리 구두를 처음 신었을 때 이랬을까. 탈라리라(날개 달린 신발)를 신은 메르쿠리우스(영어로 Mercury, 수성)의 마음이 이 같았을까.
삶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거나 수성처럼 재빠르게 하늘을 누비는 장면이 기대되어 해방감이 밀려왔다. 동시에 찾아오는 학원비에 대한 고민. 요즘 자주 듣는 ‘백수’ 소리에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는데, 말 한마디에도 마음이 흔들리는데, 퇴직금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추가 활동비라… 음~~ 괜찮을까?
단톡방의 친구들은 몇 년 전 발레수업을 함께 했었다. 수업 중 스트레칭이나 몸 풀기를 할 때 서로 도움을 주다가 친해졌다. 상대의 발이나 어깨를 자연스럽게 잡는 행위를 반복하다 보면 털 손질을 주고받으며 결속력을 다지는 원숭이들처럼 절친이 된다. 게다가 모두 성격이 무난하고 배려심이 많은 탓에 고민 상담이나 홈 파티를 할 정도로 가까워졌다. 정말이지 행복한 시간이었다. 나는 당시를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라 불렀었다.
코로나로 흩어졌던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다니. 그것도 발레와 함께. 쉽게 포기할 일은 아니었다. 책장 구석에서 ‘나빌레라’를 찾아 손에 들었다. 발레에 대한 기억을 상기시키고 싶었다.
나빌레라, 라 하면 국어시간에 봤던 조지훈의 시 <승무>가 생각날 것이다.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나는 이 구절에서 정적 속 파르르 날개를 떠는 흰나비가 연상됐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슬픔이 느껴졌다.
사실 내가 소개하고 싶은 것은 <승무>가 아니라 웹툰을 단행본으로 출간한 ‘나빌레라’라는 책이다. 작가가 시를 염두에 두고 제목을 지었는지 알 수 없으나 글에서 다소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우여곡절 끝에 해피엔딩이라 시보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밝지만 주인공이 발레를 할 때의 절박함이 승무와 같았다.
스토리를 요약하자면 할아버지와 손자뻘 청년이 발레를 통해 동시에 성장하는 이야기이다.
덕출 할아버지는 가장의 역할을 모두 마치고 70세에 어릴 때 자신을 사로잡았던 발레를 시작한다. 주변의 만류에도 원했던 꿈을 향해 진지한 발걸음을 뗀다. 상처투성이에 두려움 가득한 청년 채록은 우연히 할아버지의 발레 스승이 된다. 삐딱하고 뾰족하게 날을 세우던 채록은 치매에 걸린 할아버지의 절실함에 내면의 변화를 겪는다. 할아버지가 완전히 기억을 잃기 전 두 사람은 무대 위에서 파드되(2 인무)를 한다. 이어지는 할아버지의 독백, ‘나의 시절은 너를 만나 다행이고 우리를 만나 꿈만 같구나.’에서 나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림도 대사도 무척 아름다운 책이다. 대충 할 생각이 없다는 할아버지, 발이 가라앉지 않게 물 위에서의 발레를 상상하라는 채록, 힘이 약해지고 느릴 뿐이지 우아해질 수 없는 건 아니라고 할아버지를 격려하는 문경국 선생님. 특히 감동적인 대사는 치매로 기억을 잃어가는 할아버지가 채록에게 원하는 걸 후회 없이 해보라며, 한 번뿐인 소중한 인생을 일깨워주는 “할 수 있는데 망설이는 건 별로 두려운 게 아닐 거야.” 부분이었다.
새해 첫 근무일. 내겐 작년처럼 직장동료도 업무상 건의사항이나 개선 방안을 논의하는 시무식도 없었다. 퇴사한 지 열 달째 접어들면서 조바심이 엄습했다. 하지만 발레를 하자는 메시지에 마음이 움직여 다시 읽은 책에서 힘을 얻는다.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고, 하고 싶은 걸 기억하는 오늘. 행복한 시간을 보냈던 친구들을 만날 수 있는 지금. 나는 홀로 한해의 업무(라 하기엔 좀 그런가, 작가생활로 정정?)를 시작한다.
달력을 바꾸고 새 다이어리에 첫 글자를 썼다. 운동화 끈을 동여매고 집을 나섰다. 공원 트랙을 몇 바퀴 돌고 양지바른 쪽에 서서 잠시 볕을 쬐었다. 푸드덕 날아오르는 비둘기를 따라 하늘을 쳐다보며 ‘재미있는 이야깃거리 하나 던져주세요. 올해는 글 써서 돈 벌고 싶어요’ 같은 소망을 빌었다.
글쓰기에 흠뻑 젖어 작품 속을 살다 보면 경제적 독립과 원하는 삶의 조화를 이루지 않을까. 자주 빠져드는 두려움과 망설임 앞에 덕출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린다.
“자넨 지금 최고의 시기를 살고 있어. 고민이 된다는 건 행복한 거야. 고민조차 못 하게 되는 늙음이 찾아오면 지금 고민하고 망설인 걸 너무 많이 후회하게 될 텐데… 그래도 괜찮겠어?”<나빌레라 4> p2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