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과의 싸움 끝내기

진정한 허용

by 바람
이런저런 삶의 상황과 경험 속에서 매 순간 우리 안에서 올라오는 모든 감정, 느낌, 생각은 그것이 어떤 모양이나 빛깔을 하고 있든 모두가 다 ‘나의 마음’이다. 그렇지 않은가? 내 안에서 나왔으니 모두가 다 ‘나의 마음’인 것이다.
-김기태<무분별의 지혜>판미동-


지난 글에서 감정은 무해하고 오히려 유익한 정보를 제공해준다는 점을 류페이쉬안을 통해 배웠다. 감정을 느껴주는 것만으로 그 변화를 경험했고 감정의 도움으로 삶의 방향을 정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 시간 끈질기게 나를 힘들게 하는 감정이 있다.

나를 고통에 빠트리는 감정의 이름은 ‘억울함’이다. 억울함은 어떤 방식으로도 해소되지 않았다. 명상을 하거나 좋은 글을 읽거나 일상에 감사하는 태도로도 해결할 수 없었다. 느껴주는 것만으로 변화되던 다른 감정과는 판이했다. 억울함을 느껴주면 오히려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분노와 수치심이 올라왔다. 더 억울한 일을 당할까 봐 공포에 휩싸이기도 했다. 삶을 간신히 견디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토록 나를 괴롭히는 억울함의 진상을 파악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억울함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아무리 노력해도 사라지지 않던 억울함은 놀랍게도 ‘사람이 어쩜 그럴 수가 있어?’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게다가 그 생각은 사람은 절대로 그러면 안 된다, 라는 가정에서 기인했다.


나의 내면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혹은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일은 아무리 조그만 것이라도 치명적인 독성을 내뿜었다. 지구상에 자연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원소, 예를 들면 플루토늄에 대한 우리 몸의 허용한계가 제로인 것과 동일하다.


하지만 누군가에겐 있을 수 없는 일이 누군가에겐 당연한 일이 되기도 한다.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가정은 각자의 개인적 기질, 자라온 환경, 교육과 문화 등 다양한 사정에 영향을 받는다. 동시대를 살아가더라도 인간의 내면세계가 각기 다른 내용으로 구성되는 것도 같은 이유다.


내가 허용할 수 없다고 해서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수는 없다. 자신만의 기준으로 매번 아플 수도 없다. 절대로! 안 된다! 는 기준(법과 도덕 측면이 아니라 현실에서의 발생 가능성 측면)을 세우고 나와 타인에게 지키도록 강요하는 일은 효용성이 없을뿐더러 심각한 부작용이 있다.


스스로 정한 기준으로 인해 나는 작은 상자 속에 갇혔고 동시에 타인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졌다. 자신에게 금지한 사항은 타인에게도 예민하게 적용했다. 매 순간 자신과 타인을 오 엑스 퀴즈 문제처럼 대했다. O만 허용하고 X는 거부하는 방식으로.

그런데 잠시라도 자신을 깊이 관찰해보면 이 기준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알 수 있다. 내 안에서도 기준에 배치되는 생각과 감정이 수시로 생겼다 사라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이대로는 어떻게 해도 평온할 수가 없다. 나와 타인을 동시에 괴롭히는 꼴이다. 결국 나의 마지막 선택지는 지금 이 순간의 나를 내버려 두는 것이다. 재촉하고 바꾸려 하고 재단하고 책망하는 모든 몸짓을 멈추는 것.


마침 김기태 선생님으로부터 유사한 제안을 받았다. 이런저런 삶의 상황과 경험 속에서 매 순간 우리 안에서 올라오는 모든 감정, 느낌, 생각은 그것이 어떤 모양이나 빛깔을 하고 있든 모두가 다 나의 마음이니 한결같이 받아들여 보라는. 어떤 것은 좋아하며 받아들이고 어떤 것은 싫다 하며 거부하지 말라는.

이에 나와의 싸움을 멈추고 모든 것을 허용해보겠다. 위에서 비판적으로 평가했던 나의 가치관, 관념, 그로 인한 고통까지 모두. 심지어 받아들이고 거부하는 모습까지 남김없이……. 지금 이대로의 나를, 삶을 용기 있게 껴안아 보려 한다.


사람의 지문이 다르듯 영혼도 제각각 다른 모양이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모든 것을 허용하면 손대기 전의 내 고유한 영혼에 가닿을지 누가 알겠는가. 내 영혼에 대한 온전한 이해는 제각각 다름에 대한 허용으로 이어질지 모르니 시도해 볼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