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어도 돼

감정은 삶의 내비게이션

by 바람
건강한 심리상태란 부정적 감정이 없는 게 아니라 어떤 감정이든지 제대로 마주할 수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류페이쉬안 지음, 강초아 옮김
<감정은 잘못이 없다>유노북스-

시월 중순인데 최저기온이 한 자릿수까지 내려갔다. 연말이 코앞이다. 나도 모르게 캐럴을 흥얼거렸다.

울면 안 돼 울면 안 돼

산타 할아버지는 우는 아이에겐

선~물을 안주~신대~

그런데! 노래 가사가!!


이거 너무 한 거 아닌가.


울면 선물을 받지 못하고 나쁜 아이라는 결론에 이르는 건 좀……

삐딱선(--船)의 선장으로서 “이의 있습니다!” 외쳐본다. 어린이 해방군 총사령관 방구뽕에 빙의된 느낌이다. 삐탁선(--線)을 타고 심통의 눈으로 보니 세상만사가 불만이다. 어릴 때부터 울면 안 된다고 세뇌당한 것 같아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말 잘 듣고 착한 자식을 바라는 부모의 마음이야 백분 이해하지만 울지 않는 아이가 되라는 것은 부당한 요구로 여겨진다.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삐딱船을 탄 이유다.


아무 때나 울고 떼쓰고 제멋대로 구는 태도가 바람직하다는 말이 아니다. 아이의 사회화 교육은 꼭 필요하다. 다만 그 정도가 과할 경우 아이는 울어야 할 때 울지 않고, 웃어야 할 때 웃지 못한다.

어떨 때 울음을 터트리는가.


아이는 불편하거나 슬플 때 화나거나 억울할 때 운다.

울지 말라는 것은 슬픔, 분노, 두려움, 좌절로 울고 싶은 감정이 들어도 우는 방식으로 표현하지 말라는 의미다. 차분하고 세련된 언어로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건 어른에게도 힘들다. 섬세한 아이일 경우 양육자가 허용하지 않는 감정을 잘못된 감정으로 내면화할 가능성이 높다. 울고 싶은 감정을 나쁜 감정으로 규정짓고 억누르게 된다.


동요일 뿐인데 이토록 불만을 토로하는 원인이 있다. 나란 인간이 감정을 억누르는 섬세한 아이의 전형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많은 아이들이 비슷한 성향을 가졌으리라 추측된다.

감정을 억누르는 나의 습관은 어른이 된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 오히려 심해졌다. 그러다 보니 뒤죽박죽 뒤섞인 감정의 정체를 파악할 수 없거나 꾹꾹 감춰둔 불편한 감정이 뒤늦게 폭발하기도 한다. 불혹을 지나 지천명 언저리를 서성이면서도 여전히 미혹되어 흔들린다. 요즘은 갱년기의 욱하는 증상까지 더해졌다. 감정의 쓰나미에 익사할 것만 같아 류페이쉬안의 책을 들었다.


‘감정은 잘못이 없다’에는 심리적 어려움을 겪는 다양한 사례가 있다. 읽다 보니 열거된 인물들과 나는 큰 차이가 없었다. 그들처럼 나는 감정을 이분화했다. 기쁨, 사랑, 여유, 평온 같은 감정에는 긍정의 꼬리표를 달고 불안, 공포, 미움, 화, 거부 같은 감정에는 부정의 꼬리표를 붙였다. 긍정의 감정은 편안하게 느끼면서 부정의 감정은 극도로 두려워했다.


그 두려움은 부정적 감정이 발생하지 않도록 안간힘을 다하게 만들었다. 혹여 낌새라도 보이면 동동거리며 피했다. 내 앞에 펼쳐진 상황을 별일 아닌 일로 무마하려 들거나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는 식으로 진짜 감정을 부인하기도 했다. 폭식이나 폭음으로 마음을 달래는 경우도 잦았다. 불편한 감정에서 멀어질 수 있다면 뭐든 시도해보고 싶어 했다.


그러나 류페이쉬안은 감정에 대한 인식을 달리하라고 조언한다. 감정은 좋거나 나쁜 것이 없고 통제할 수도 없다. 억압한다고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은 감정을 느껴주는 것뿐이라고 한다.


감정을 느끼기만 하면 된다니 간단해 보이지만 실천은 굉장히 어려웠다. 자신을 관찰하기 전엔 몰랐다. 부정의 꼬리표를 붙인 감정을 제대로 마주한 적이 없었다는 것을.

불편한 감정이 올라오면 나는 안절부절못했다. 어떻게 하면 저 감정을 긍정의 감정으로 바꿀 수 있을까 고민했다. 부정의 감정에서 도망치는 것이 지상 최대의 과제가 되었다. 꼭꼭 숨어 머리카락까지 감춰도 불안과 화는 집요한 술래가 되어 나를 잡으러 왔다. 마치 한 번이라도 같이 있어달라고 조르는 아이처럼 반복적으로 찾아왔다.


이렇게 도망 다니는 것도 지친듯하여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으로 감정에 몸을 던졌다. 불안하면 불안해하고 화나면 화난 채로 있고 무기력하면 무기력하게 있었다. 나를 찾아오는 감정에게 머물 공간과 시간을 내주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불안 후 평온이, 분노 후 사랑이, 무기력 후 열정이 찾아왔다. 동전을 뒤집으면 다른 그림이 나오는 것처럼 밤이 지나면 아침이 오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변했다. 내 감정을 존중하니 타인의 감정을 진정으로 존중할 수 있었고, 불편하면 불편하다 할 수 있고 원하면 원한다 할 수 있게 되었다. 여전히 서툴지만 감정을 지나가는 비나 구름처럼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 중이다.

류페이쉬안은 감정이 품은 정보의 유익함을 강조했다. 감정을 통해 자신이 좋아하고 집중해야 할 대상을 찾을 수 있고 위험을 피할 수 있으며 도전할 때와 쉴 때를 구분할 수 있다고 했다. 감정이 삶의 내비게이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나는 그토록 억누르고 싶었던 감정(잘랄루딘 루미의 시에 등장하는 절망 슬픔 후회 등등)을 여인숙의 손님처럼 환영하진 못해도 감정에 관심을 가져보기로 했다. 너덜너덜해진 마음을 그대로 수용하기로 했다.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아이뿐 아니라 어른에게도 말하고 싶다. 슬프거나 억울하면 울어도 된다고…… 감정이 삶의 나침반이라는데 우는 게 뭐가 그리 대수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