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C Jul 08. 2023

아름다움은 훼손되지 않는다

웨스 앤더슨,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2편

(지난 글에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1. 이야기 구조와 시대 배경


우선 영화의 시대적 배경과 화면비에 관한 설명을 짚고 넘어가려고 합니다. <그부페>는 러닝타임 상 9분의 시간이 지나서야 본격적인 1932년도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1932년에 도달하기까지 영화는 현대부터 1985년, 1968년을 각자 다른 화면 비율을 통해 하나하나 액자로 만들어 나가죠. 일단 가볍게 이야기해서, '액자 속의 액자 속의 액자 속의 이야기'라는 구조는 전승되고 전승되는 이야기를 부각시킵니다. "1932년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가 아닌, 우리와 같은 시대를 사는 한 소녀가, 읽는 책을, 쓴 작가가, 실제 주인공에게 이야기를 들은 경험을 회상하면서, 그 회상 속 이야기가 등장하고, 그 이야기가 다시 앞선 과정을 거쳐서 영화 마지막에 소녀가 읽는 책까지 올 때, 비로소 저는 이 이야기가 내게 전해졌다는 감정을 느꼈습니다. 도입부를 조금 더 자세히 짚어보자면,

1.85:1 비율로 찍힌 현대 장면 (작가가 죽었을 때)

⬇️

1.85:1 비율이지만 프레임 크기 자체가 조금 줄어든 1985년 장면(작가가 늙었을 때, 제로가 죽었을 때) (냉전 이후 현대 시대)

⬇️

2.35:1 비율의 1968년 장면(작가가 젊었을 때, 제로가 늙었을 때) (냉전 시대)

⬇️

1:37:! 비율의 1932년 본격적인 이야기 장면(제로가 어렸을 때, 구스타브가 살았을 때) (전쟁 시대)


이런 식이었죠. 여기서 조금 더 섬세하게 짚고 넘어가자면 <그부페>는 1:85:1 비율을 기본 스크린 비율로 설정한 뒤, 극 중 1.85:1 비율 장면들의 프레임을 축소 시키고, 나머지 비율의 장면들은 레터박스를 둘러서 화면을 구성했습니다. 이건 1932년의 이야기를 더욱 오롯이 남기면서, 현재로 돌아온 이야기 역시 우리가 보고 있는 '영화라는 이야기'라는 걸 일깨우는 프레임 배치입니다(쉽게 얘기해, 1:85:1 비율로 찍힌 현재의 프레임이 화면을 꽉 채우지 않고 레터박스를 두르고 있다는 이야기).


그럼 영화의 메인 연도인 1932년의 시대적인 배경을 살짝 짚어볼게요. 1932년은 1차 세계대전(1914 ~ 1918)과 2차 세계대전(1939 ~ 1945) 사이에 있는 시기입니다. 하지만 영화가 다루는 1932년이란, 실제 1932년이라기 보단 여러 시대가 합쳐진 느낌이 강합니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부터 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기 직전까지의 풍요로운 시대 '벨 에포크'를 향한 그리움이 묻어있으면서, 그 시대를 파괴한 전쟁을 향한 비판 역시 드러내고 있죠. 특히나 영화 마지막 호텔을 점거하는 군인들은 나치 친위대를 연상시키는 깃발을 들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헨켈스(애드워드 노튼)로 대표되는 전반부의 군인들과 후반부 등장하는 군인들은 그 외양에서부터 차이를 보입니다. 후자는 훨씬 야만적이고 거친 형상을 하고 있죠. 이 두 군인 사이의 대비는 영화가 다루고 있는 다층적인 시대를 그대로 드러냅니다.

아직은 구스타브의 교양과 매너가 작동하던 세계.
그렇지 못한, 구스타브가 살아갈 수 없는 세계.


그에 더해, 영화의 배경은 '주브로스카 공화국'이라는 가상의 나라입니다. '부다페스트' 호텔이라는 제목으로도 연상이 가능하지만, 이 나라는 오스트레일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가 부다페스트였던 시절을 배경으로 합니다. 동유럽이라는 배경은 주브로스카 공화국의 최고 갑부가 된 제로가 사유 재산을 인정하지 않는 국가에게 천문학적인 돈을 지불하면서 간신히 호텔을 지키게 된 사연과 관련이 깊죠. 주드 로가 연기한 젊은 작가 역시 제로의 사연을 들은 이후 남미로 오랜 여정을 떠났고, 오랫동안 유럽에 돌아오지 않았다는 나레이션을 합니다. 그가 말하는 '오랫동안'이란 아마도 공산주의가 동유럽을 지배하던 시기였을 겁니다. 그리고 그가 '고혹적인 유적'이라고 말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여전히 전쟁과 냉전 시대를 거치며 이야기와 품위를 간직해온 늙은 구스타브 같은 세계였을 테고요. 저는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생각하면 1968년의 낡고 추레한 모습의 호텔이 가장 머리속에 남아있습니다. 그 호텔 안을 떠다니던 과거의 이야기들이 못 견디게 쓸쓸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이 영화에는 있는 것 같아요.







2. 예술은 아름다움을 갖고자 하는 것


웨스 앤더슨은 자기 자신에게 영감을 준 시대나 문화권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만들어내는데 거리낌이 없는 감독입니다. <다즐링 주식회사>는 현대 인도를 배경을 찍었고, <개들의 섬>은 근미래의 일본을 배경으로 하고요. <로얄 테넌바움>에서는 현대 뉴욕을 배경으로 1970년대의 소품으로만 영화를 채워 자기만의 뉴욕을 창조해냈습니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역시 앞서 말했듯 벨 에포크, 1,2차 세계대전, 공산주의 시대의 동유럽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조합해냈습니다.


곧 웨스 앤더슨은 <그부페>에 영향을 준 스테판 츠바이크의 소설 제목처럼 '어제의 세계'를 향한 향수를 드러내왔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그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예술적인 방식, 곧 영화로 부활시켜온 감독 같아요. “사랑은 아름다움을 영원히 갖고자 하는 것이다”라는 소크라테스의 말. 여기서 사랑을 '예술'로 바꾸면 웨스 앤더슨의 영화에도 적용 가능한 말이 되는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그부페>가 그리는 시대는 야만과 폭력, 위기의 시대 직전에 여전히 예술과 인간과 심미적인 시가 마지막으로 살아있던 시대이기도 합니다.


제로와 구스타브는 끊임없이 장시를 낭송하고, 영화 마지막에는 아가사 역시 시를 지어냅니다. 또한 구스타브와 제로는 긴박하고 막막한 상황에서도 말장난을 치며 문학적인 유희를 놓치지 않죠. 당장 도망가야 하는 상황에서 서지 X 향한 묵념을 남기기도 하고요. 또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무도회장에는 그 시대, 호텔이 있던 산을 그린 그림이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제로와 구스타브, 아가사가 지켜낸 그림 '사과를 먹는 소년' 역시 그림을 팔겠다고 했던 구스타브의 말과는 달리 여전히 로비에 걸려있습니다.


뒤에 걸려있는 같은 그림
삐뚤어진 '사과를 먹는 소년'을 제대로 거는 제로


그렇게 웨스 앤더슨은 자기가 만들어낸 가상의 세계를 전승되고, 사라지지 않는 예술적인 세계로 남겨놓습니다. 그에게 예술이란, 소멸해가는 아름다운 것들에게 불멸성을 부여해주는 것. 내가 알지 못하고 겪어본 적 없는 세계를, 내가 사랑하는 방식으로 되살리는 것이 예술이라고 말하고 있는 듯해요. 또한 그 예술은 그림이 되어, 시가 되어, 문학이 되어, 영화가 되어, 그러니까 결국 '이야기'가 되어, 전승되는 것이라고요. 서로 다른 시대를 몇 번이나 건너가면서요. 또한 웨스 앤더슨에게 아름다움이란, 찢기고 죽임 당하고 낡고 스러지더라도 결코 훼손되지는 않는 오롯한 가치를 지닌 게 아닐까 합니다. 모든 것이 현대화되고 빨라지기만 하는 시대에 웨스 앤더슨이 차려놓은 아름다운 예술을 천천히 곱씹어보는 시간은 정말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 같아요.


또한 재미있는 건 이 영화가 ‘아름다움’을 대하는 시선인데요, 항상 그의 영화에는 미적인 것에 대한 잉여적인 시간이 등장합니다. 전작들을 하나하나 짚어볼 수도 있겠지만, <그부페>만 해도 그런 장면이 많죠. 멘들스를 만드는 장면이라든지, 탈옥을 위해 한 죄수(하비 케이틀)이 그린 지도를 칭찬하는 장면, 앞서 말한 재밌는 말장난이나 시 낭송 시간 역시 그렇습니다.


특히나 재밌었던 장면은 탈옥을 위한 땅파기 도구를 반입하는 장면이었어요. 반입되는 음식들을 일일이 찌르거나 잘라서 내용물을 확인하던 간수가, 아가사가 만든 멘들스 케이크만큼은 너무 아름다운 나머지 그냥 통과를 시키는 장면입니다. 이 장면에서 ‘미’라는 가치는, 단지 서사의 배경에 위치하는 게 아니라 서사를 진행시키는 중요한 수단이 됩니다. (“아름다움은 훼손할 수 없다. 그리고 그 안에는 우리를 폭력의 감옥으로부터 탈출시킬 수 있는 힘이 숨겨져 있다”는 말처럼 들리기도 했고요.) 마찬가지로 마지막에 군인들이 점거한 호텔 안을 제로와 구스타브가 잠입할 수 있는 방법 역시 멘들스 배달원이었어요. 이 영화에서 '멘들스'란, 어떤 상황에서든 색을 잃지 않고 우리를 구원해주기도 하는 음식입니다. 곧 구스타브가 사라진 세계는 멘들스가 사라진 세계이기도 한 셈이죠.


그런 점에서 극중 악역으로 등장하는 데고프 가문의 세계는 이러한 아름다움에 반하는 야만적인 세계입니다. 그림을 바꿔친 것조차 도록을 보고서야 알아보는, 교양 없는 무지한 세계죠. 이는 호텔의 세계와 정반대입니다. 그들은 제로와 구스타브의 시를 자꾸 끊기게 만듭니다. 그림을 훔치려 합니다. (하지만 웨스 앤더슨은 그들의 모습으로도 가학적인 재미를 만들어내죠.) 그런데 그런 데고프 가문마저 굴복시키는 것이 있으니 바로 '서류'입니다. 그들이 일으켰던 폭력은 결국 마담 D가 남긴 2차 유언장의 사본으로 인해 사그라드니까요. 웨스 앤더슨에게 이러한 서류란, 딱딱 질서 맞춰진 그의 세계를 이루고 있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겁니다. 그렇기에 종반주 군인들이 신분을 증명하는 서류를 찢어버리는 장면은, 그렇게 질서 잡힌 서류와 호텔의 세계를 없애버리는 상징적인 장면이기도 한 것이죠.


하지만 야만적인 이들에 의해 잃어버린 줄 알았던 색은 다시금 그의 영화를 통해 되살아나고, 아가사를 향한 제로의 절대적인 사랑으로 지켜집니다. Z에서 A로, 다시 A에서 Z로 이어지는 예술과 사랑의 서사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십자열쇠만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문을 열고 호텔 안으로 들어가 그 속의 멋진 이야기들을 살아낼 수 있겠지요. (2021.06)





작가의 이전글 웨스 앤더슨의 가공된 세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