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면상으로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숙제>는 그의 표현대로 ‘리서치 영화’의 형식을 띤다. 첫 내레이션에서 감독이 직접 설명하다시피 키아로스타미는 아들의 학교 숙제를 도와주다가 이란 학교 교육의 부조리함을 발견했고, 이를 직접 조사해보고 싶어 카메라를 들었다. 그는 테헤란의 한 초등학교에서 학생들 한 명 한 명을 인터뷰한다. 감독이 각 인터뷰를 긴 호흡으로 제시하는 방식은, 자연스레 이란 공교육과 더 나아가서는 이란 사회가 가진 문제점을 드러내는 효과적인 르포르타주가 된다.
그런데 키아로스타미가 택한 조사 방식과 그가 인터뷰이를 대하는 태도, 그리고 영화와 관객 사이에서 벌어지는 불일치는 이 영화를 표면적인 고발 다큐멘터리로만 대할 수는 없게 한다.
인터뷰 대상은 초등학교 1~2학년생들이다. 아직 자기들이 느끼는 게 무엇인지, 무엇이 잘못되었고 무엇이 이상한지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나이. 아마 키아로스타미는 그래서 이들을 인터뷰이로 정했을 것이다. 영화는 공교육이 어떻게 잘못되었는지를 차근차근 설명하지 않는다. 단지 관객이 그 사실을 고스란히 느끼게 할 뿐이다.
관객이 인터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이들이 하는 진술과 그들이 처한 상황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이들은 자주 인지부조화에 빠진다. 전날 밤 12시까지 숙제를 했다고 말하고, 숙제를 다 하지 않으면 벨트로 맞는다고 고백하면서도 만화와 숙제 중 무엇이 더 좋냐는 질문에는 숙제라고 대답한다. 아이들은 자기 답변이 얼마나 이상한지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다. 키아로스타미는 아이들의 창의력을 말살시키는 숙제, 숙제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교육의 주체를 가정으로 떠미는 공교육, 가정 안에서 자행되는 공공연한 폭력, 그 안에 자리하고 있는 트라우마적인 높은 문맹률, 그런 문맹률이 나올 수밖에 없는 복합적인 교육의 악순환을 저학년 학생들을 인터뷰하는 것만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숙제>의 다큐멘터리적 미학 - 주제를 제시하는 것이 아닌 체험시킨다는 것
그런데, 정말 그런가? 그러니까 '학생들을 인터뷰하는 것만으로' 라고 말할 수 있는가. 감독은 이 인터뷰를 ‘어떻게’ 하고 있나. 정확히 말해 키아로스타미가 학생들을 인터뷰하는 방식, 그리고 그걸 관객에게 노출하는 방식이 영화의 주제를 얼마나 더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는지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이 지점을 되짚어 보는 것은 앞선 학생들의 진술이 불러왔던 불일치에서 더 확장된 감각을 체험하는 일이었다. 키아로스타미는 이 인터뷰에서 ‘감정의 언어’를 의도적으로 배제했다. 감독은 너무나도 냉철한 태도로 질문을 던졌다. 여기엔 어떠한 연민의 시선도 없었다. 심지어 가끔 소리를 작게 내는 아이에게 다시 말할 것을 요청하는 대목 등에서는 일말의 폭력성까지 느껴졌다.
감독은 의도적으로 공감이 유리된 언어를 아이들의 답변과 '함께' 관객에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러한 인터뷰 방식이 기성세대가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와 닮아있을 때, 관객인 우리는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더욱 긴밀하게 체험하게 된다. 단지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문제를 ‘제시’하는데 그치는 게 아니라, 그것을 관객이 인지부조화를 통해 스스로 겪게 만든다는 것에 <숙제>의 다큐멘터리적 미학이 숨어있다. 인터뷰 중간중간 틈입되는 인자한 표정의 카메라맨과 질문을 던지는 감독의 모습은 바로 그 불일치를 직시하는 메타적인 시선이자, 그 자체로 불일치를 조장하는 연출이 되기도 한다.
영화의 마지막 인터뷰이는 인터뷰 공간마저 체벌의 공간으로 인식해 울음을 그치지 않는 학생이다. 이 학생은 맞게 될까 봐 두려워 계속 친구를 불러달라고 요청한다. 그리고 제작진은 실제로 친구를 불러주기도 한다. 하지만 이 행동은 학생을 안심시키고자 하는 게 아니라, 학생을 안심시킨 후 인터뷰를 더 진행하는 것에 그 목적이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만약 전자라면 이 학생을 다시 부르지도 않았을 것이고 너무 불안해하며 가고 싶어 하는 학생을 붙잡고 기도문을 외워보라는 요구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나는 이 인터뷰 공간이 학생에게 또 다른 트라우마로 남지 않을까 걱정했다. 기도문을 외우는 학생의 눈동자는 이미 그럴 거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렇다면 감독은 그걸 모르고 있을까? 마지막 숏으로 제시된 인터뷰 공간이 너무나 취조실과 닮아있다는 충격은 그렇지 않을 거라는 대답을 하게 만든다. 단지 키아로스타미는 무엇이 효과적인지를 알았을 것이다. “영화를 찍다가 아이에게 상처를 줬는데 어떻게 하나요?”라는 질문에 키아로스타미가 마스터클래스에서 했던 대답은 <숙제>를 통해 제시할 수 있는 윤리적인 질문과도 일치한다. “좋은 영화라면 괜찮지. 아이들은 금방 잊으니까.” 키아로스타미는 <숙제>를 적어도 효과적인 영화로 만드는 법을 알았다(아직 ‘좋은 영화’라는 표현은 쉽게 쓸 수 없겠다).
하지만 여기서 제시해 볼 수 있는 질문이 하나 더 남아있다. 학생이 인터뷰 공간을 끝내 믿지 못했다면 그 공간은 여전히 진실한가? 나는 저 공간을 온전한 인터뷰 공간으로 믿을 수 있는가? 이런 질문은 영화가 스크린을 통해 제시하는 리얼리즘적인 상황이 관객인 내가 받아들이는 상황과 일치하지 못하기에 생겨난다. <숙제>는 이렇게 영화 내적인 논리에서부터 영화 외적인 작동에 이르기까지, 진술/상황, 인터뷰이/인터뷰어, 감독/관객 사이의 불일치를 확장시켜며 영화의 외연을 넓혀나간다. 그것은 현실과 상호작용하는 텍스트로서의 영화이며, 다큐멘터리적 세계에 영화적 방식으로 틈을 만들어낸 뒤 관객이 앉아있는 현실의 감각을 그 안으로 불어넣는 방식이기도 하다.
키아로스타미의 음소거, 그리고 남겨진 카메라의 음성
그러나 동시에 키아로스타미가 택한 한 가지 연출은, 아무것도 모른 채 사회의 불합리함을 증언하는 주체가 되었던 학생들을 잠시나마 존중하는 장면을 이끌어냈다. 그건 바로 영화 종반부 종교의식에서 그가 “의식을 존중하기 위해”라고 언급하며 행했던 음소거다. 여기서 ‘의식을 존중한다’는 내레이션의 의미란 과연 무엇일까? 그전에, 과연 관객은 이 종교/정치의식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을까?
여기서 나는 내 최초의 반응을 상기시켰다. 학생들이 자기도 모르게 알라를 향한 숭배의 언어를 다 같이 내뱉는 모습. 이 장면에는 이러한 의식을 향한 비판적인 함의가 담겨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광경은 즐거워 보였다. 다시 말해 아무것도 모르는 학생들에게는 이 세뇌 의식조차 즐거운 놀이일 수 있다는 말이다. ‘의식을 존중하기 위해 음소거를 택한다’는 말은 언뜻 보면 모순적이다. 키아로스타미는 이 의식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것만 같은데, 어떻게 그것을 존중한다는 것일까.
다시 생각해 보자. 학생들이 세뇌 의식에 참여하고 있고, 그걸 담아내는 감독이 이를 오로지 비판적으로만 검토하여 카메라를 들고 있다면 의식을 저마다의 즐거운, 혹은 지루한 놀이로 받아들이는 아이들은 그 사이에서 덩그러니 남겨진다. 그렇다면 아이들의 몸짓은 (종교의식을 향한 비판이라는) 기의만을 위한 텅 빈 기표가 된다. 그러므로 이 음소거는, 반대로 지금 이 의식을 통해 놀고 있는 학생들을 위해 세뇌의 음성을 제거하고 놀이의 몸짓만을 남겨두는 시도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러한 키아로스타미가 남겨둔 일말의 존중을 빼놓고 <숙제>를 논할 수는 없다.
그가 음소거를 했다. 학생들은 저마다 몸을 베베 꼬면서 종교의식 시간을 견디고 있다. 하지만 온전한 음소거가 아니다. 영화관에는 분명 기계 소리가 들렸다. 카메라가 찍고 있는 상황이 음소거되었고, 영화관 안에 다른 소리가 끼어들 여지는 없으므로, 그 기계 소리란 카메라가 돌아가는 소리다. 그렇게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이 카메라 소리는 학생들을 찍고 있는 주체를, 그리고 그들을 카메라를 통해 보고 있는 우리를 환기시킨다. 제4의 벽을 허물었다는 식의 재미없는 논평을 더할 생각은 없다. 다만 영화가 슬금슬금 확장시키던 불일치와 더불어 이러한 시도로 영화의 바깥을 봉합하려 시도할 때, 이 영화는 조금 더 온전해지는 기분이 든다. <숙제>는 비로소 효과적인 영화일 뿐 아니라 좋은 영화일 수도 있는 가능성을 얻는다. 확장되면서도 스스로의 세계를 끌어안으려는 시도가, 이 영화에는 살아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관객과 영화 사이에서 줄을 타는 카메라의 음성과 함께.